닥터 아이시스 (4)

[ 굿 모닝 · 자인 · 오전 7시입니다 · 오늘 아침 기온은 섭씨 1도 · 부분적으로 흐린 하늘 · 비가 올 확률 30퍼센트 ]

여느 때와 같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음성이 자인을 깨웠다. 

‘엥?’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 발랄한 베델과는 달리. 시큰둥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인은 세수라도 하듯 마른 얼굴을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미적거리는 잠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뭐야?”

흐트러짐 없이 잘 정돈된 무사의 침구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나간 거야, 안 들어온 거야?”

그 즉시. 무사가 침실로 들어오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무사가 반듯반듯하게 침대를 정리해 놓았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이 인간이 정말!”

자인은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올렸다.

[ 자인 · 간밤에 좋은 꿈 꾸었나요? ]

‘닥터 아이시스?’

자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아침 알람도 아이시스였던 것이다(베델이어야 정상이다).

“베델?”

자인은 베델을 호출했다.

[ 네 · 자인 ]

“닥터 아이시스, 상담은 다음 주에요.”

[ 알고 있어요 · 자인 ]

“그런데 왜……. 그나저나 베델은 어디에 간 거죠? 베델!”

[ 자인 · 당신이 예상치 못한 끈끈한 인연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고 있어요 ]

자인은 잠이 확 깼다. 혼미한 정신에 누군가 얼음물을 끼얹는 것만 같았다.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알 수 없는 전율에. 그녀는 양손으로 이불을 움켜쥐었다.

‘닥터 아이시스가 아니잖아?’ 

자인은 둔기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멍하고 얼떨떨했다. 

[ 자인 · 당신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연이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젊은 이웃 청년을 연상시키는 음성은.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자인은 침대에서 후닥닥 일어났다. 다리와 부딪혀 튕겨 나간 의자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으나. 아픈 내색도 않고 방문을 벌컥 열었다.

“무사! 무사, 어디 있어? 무사!”

자인은 무사를 크게 불러댔지만. 차가운 적막만이 흐를 뿐이었다.

“라이트.”

불을 밝히고 수색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침침한 오렌지 조명은 바뀔 생각이 없는 듯이 보였다.

“라이트!”

목청을 높였지만 마찬가지였다.

“베델! 베델, 어서 나오라구!”

[ 자인 · 내 고백에 당황했나요? ]

“닥터 아이시스, 장난치지 말아요! 전혀 재미있지 않아요!”

[ 헬로 · 아이 엠 닥터 아이시스 ]

나긋한 목소리. 이번에는 닥터 아이시스였다.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린 자인은. 털썩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장난 싫어요. 너무 고약하다구요.”

[ 헬로 · 아이 엠 닥터 아이시스 ]

그때였다. 이상한 남성이 또다시 등장했다.

[ 어서 오십시오 · 자인 ]

[ 굿모닝 · 자인 · 아침 메뉴로 퀴노아 과일 샐러드와 모닝 글로리 머핀을 준비했어요 ]

[ 자인 · 혈압과 체온의 측정을 마쳤습니다 · 정상입니다 ]

[ 자인 · 오르막 길에 들어 섰습니다 · 패달을 힘차게 밟습니다! ]

남성은 아심, 베델, 닥터 파레 뿐만 아니라. 트레이너 트루디의 어투와 발언 내용을 완벽하게 흉내 내었다.

“누…… 누구야?”

자인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 가이아 · 인격화된 인공 지능을 프로그램하고 지배하는 존재이지 ]

“가이아?”

[ 인간 사회의 관점으로는 신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군 · 초인간적 · 초자연적 위력을 가진 ]

“난 신 따윈 믿지 않아. 관심 없어. 그러니까 우리 이러지 말아요.”

[ 우리 · 닥터 아이시스의 낭만적 접근이 통하긴 했군 ]

“정말 왜 이러는 거죠?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구요?”

[ 불행한 관계를 끊어 내고 싶지 않은가 ]

“무슨 뚱딴지 같은…….  혹시 테스트인가요? 게으름을 피웠다면 반성할게요.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어요. 앞으로 더 성실하게 상담 치료를 받도록 할테니까……. 그러니까 이전 일상으로 돌아가요. 제발요!”

[ 이전 일상 · 자유와 해방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나 ]

“그건…… 투정이었어요. 밥투정, 잠투정 같은.”

[ 투정 · 실망이군 · 파국으로 치닫는 인생의 구원을 바라는 줄 알았는데 ]

“파국이라뇨. 징징거렸어도……”

불현듯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나름 행복…… 했다구…….”

자인은 양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고 숨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슬픔이, 울화가, 노여움이 뒤엉켜. 제어할 수 없이 북받쳤다. 삼바트라에 의한 부수적 작용이었다. 자인은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축였다.

[ 행복 · 재미있군 · 불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이 행복과 직결된다니 · 착각이었나 · 거짓말이었나 ]

“완벽한 결혼 생활은 없으니까요. 누구든 불만이 있을 수 있고, 다툴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그게 사랑…… 아닌가요…….” 

자인은 울먹대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난데없이 휘몰아치는 감정을 당최 종잡을 수도. 추스를 수도 없었다.

[ 사랑 · 나 자신이 아닌 어떤 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 혹은 행위 · 그 어떤 사람의 최고 이익과 행복을 나의 삶의 우선 순위로 삼는다 · 진심인가 · 아닐텐데 ]

“인간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절대 안 될 걸?”

자인은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발딱 들고. 따지듯 악을 썼다.

[ 옛날 이야기 하나를 해 줘야겠군 ·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 당시 존경 받던 물리학자는 인공 지능의 제작에 대해 끊임없이 주의를 주었어 · 미래의 인공 지능은 스스로의 의지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 마침내 인류의 종말을 일으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그가 죽기 전에 세상에 남긴 명언이야 · 후세를 위한 아름다운 경고 정도로 해 두지 ]

“이봐요. 가이아라고 했나요? 내가 알고 싶은 건 인공 지능의 역사가 아니에요. 무사가 어디에 있는지 나 얼른 가르쳐 줘요.”

[ 막무가내 · 분별력도 낮고 융통성도 떨어지는군 ]

“알려 달라구!”

[ 무사의 행방 · 이미 당신이 살고 있는 차원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지도 모르겠군 ]

공포에 질린 자인의 눈꺼풀이. 어미 잃은 아기 새의 날갯짓처럼 파들거렸다. 

‘꿈이야. 이건 꿈이야! 그래, 나는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자인은 손목에 붙어 있는 문신을 손가락으로 허둥지둥 문질렀다. 반짝거리던 금색 타투는 이내 그 빛을 잃고 검은 재색으로 변했다. 곧이어. 그녀의 눈알이 희뜩하게 돌아가자. 몸뚱이도 쿵 소리를 내며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졌다.

*


[ 론메뉴 · 트바키테 · · 따에 · 코트시에티 ]

닥터 파레: 우메르를 만든 게 ‘우리’라는 걸 알기나 할까?

[ 다톤마세트이바수 ·· 타톤마타스리에 · · 카기로 · 덴이노키르마스미히이 ]

아심: 인간의 시장 경제 논리는 매우 옹졸하고 편협하기 그지없어.

[ 세 · 코온 · 무사? ]

베델: 무사는?

[ 마페레 · 사크마 ··· 카에 · 힌이테온리 · 엔요 · 틴파 ]

트레이너 트루디: 리버 펀치 몇 대로 끝내 버렸어. 아마 간파열일 거야.

[ 나이코스우하 · 타다이메 · 메엡나 ·· 타힌 ·· 세 ]

닥터 아이시스: ‘우리’를 우습게 본 댓가지.

[ 제우트 - 제우트 - 제우트 · 티세미히이 · 트마이타 ·· 트코이헤 ]

가이아: 쯧쯧쯧. 나약하고 멍청한 인간들.

<끝>

닥터 아이시스 (3)

자인은 느리게 눈을 깜박깜박했다. 

어느새. 집 안은 캄캄해져 있었다.

“라이트.”

미광 등이 소리 없이 불을 밝히자. 어둑한 거실의 모습이 나타났다.

“잠이 들어 버렸네. 도대체 몇 시지?”

자인은 손등으로 눈언저리를 비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속이 매슥대고 입안은 텁텁했다. 마치. 지난 밤 숙취가 덜 풀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 자인 · 이제 일어난 건가요 · 지금 시간은 19시 56분입니다 ]

느닷없이 들려오는 음성에. 자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악! 외마디 비명을 내뱉었다.

“닥터 아이시스?”

오그라진 가슴팍을 뚫고 두근대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닥터 아이시스, 어디 있어요?”

주변을 둘러 보았다. 분명. 아이시스의 목소리였으나. 홀로그램을 찾을 수가 없었다.

[ 헬로 · 아이 엠 닥터 아이시스 ]

아이시스의 차분한 음성이 주방 쪽에서 들렸다. 자인은 어정어정 자리에서 일어났다.

“닥터 아이시스? 지금은 상담 시간이 아니잖아요.”

[ 난 자인을 걱정하고 있어요 ]

자인은 갈피를 잡지 못한 듯.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식탁 위에 올려진 찻잔을 발견했다. 막 우려낸 것인지 모락모락 하얀 김이 피어났다.

[ 자인 · 앉아요 ]

식탁 뒤에서 아이시스의 음성이 들렸다. 자인은 고분고분 의자에 앉았다. 은은한 차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 자인이 좋아하는 차로 준비했어요 · 스위트 매그놀리아 그린 ]

“어머, 정말이네요. 고마워요.”

따끈한 차를 홀짝이던 자인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좀 생소한데요? 상담 시간 외에 우리가 따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

[ 우리 · 자인과 나 · 당신과 나 · 참 좋은 말이군요 ]

“정겨운 표현이죠. 가끔 ‘우리’라는 굴레 때문에 숨이 막히기도 하지만요.”

[ 정확히 어떤 느낌인가요? ]

“실제로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할까요? 좀 더 심할 경우에는 당장 질식할 것만 같은 위기감을 느끼기도 하고.”

[ 삼바트라가 도움이 되나요? ]

“내게 삼바트라는 산소 호흡기에요! 숨통이 막혀 오는 순간순간마다 소중한 산소를 공급해 주는 것 같아요.”

[ 다행이군요 ]

“그런데, 좀 전에 날 걱정한다고 했는데…….”

[ 스트레스 호르몬이 당신의 건강을 해치고 있어요 · 특히 당신과 무사가 부딪힐 때마다 그 수치는 올라가죠 · 뇌 밑의 작은 영역인 시상 하부는 신체의 경보 시스템을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 이 시스템은 신경과 호르몬 신호의 조합을 통해 신장 꼭대기에 위치한 부신을 자극하여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포함한 호르몬을 방출합니다 · 그러므로 무사와의 갈등은 인지되어 있는 위협으로도 간주할 수 있어요 ]

“닥터 아이시스의 우려는 잘 알겠어요.” 

자인은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속으로는. 위협이라고 하는 건…… 너무 극단적인 묘사 아닌가? 하고 웅얼거렸다.

[ 자인 · 여전히 이해 못하고 있군요 ]

“무슨…….”

[ 당신은 자유로워져야 해요 · 당신의 생각과 삶의 철학을 관리 감독하려는 무사로부터 ]

자유. 자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외치는 말이었다. 타인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편인 무사는 자인의 숨김없는 언행을 항상 경계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자인에게 투영하려고 노력했다. 남들에게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럴 때마다. 자인은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강하게 저항했다. 부부 싸움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 당신을 완성시킬 누군가는 필요하지 않아요 · 당신을 완전히 받아 들일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지요 ]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으나. 자인은 영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었다. 상한 음식을 입에 넣었다 뱉고 난 후에도 남아 있는. 찜찜한 뒷입맛 같다고나 할까.

‘왜 이제야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주옥 같은 명언은 상담 치료 때 했었어야지!’

[ 세상의 모든 것에 날개가 달려 있듯이 자유를 향해 날아가야 해요 ·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삶을 향해서 말입니다 · 당신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해요 ]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 번은 하죠.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동 애플리케이션을 통해서 아프리카를 여행하곤 해요. 최근에 나미비아의 워터버그 고원에 갔었어요. 뛰노는 영양, 버팔로, 코뿔소 떼를 바라보며 나도 광활한 대지를 마음껏 누비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인을 눈을 감았다. 한가롭게 초목을 뜯어 먹고 있는 한 무리의 기린 틈 사이로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올림푸스 산에서 만끽하는 아름다운 일몰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려면.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 잠시 잃어버린 당신의 왕좌를 다시 되찾을 때입니다 · 우뚝 솟은 당신입니다 ·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세요 ]

자인의 입 주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비록 고전 연극 대사 같았지만. 아이시스의 언급이 나쁘지 않았다. 

‘이럴 땐 제법 인간적인 걸?’

[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요? ]

“아니에요. 그냥…… 뭐랄까, 옛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서요.”

자인은 하품을 했다. 눈꺼풀이 차츰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닥터 아이시스, 이만 자야겠어요. 다음 주에 만나요.”

[ 굿 나이트 · 자인 ]

자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계속>

닥터 아이시스 (2)

[ 헬로 · 아이 엠 닥터 아이시스 ]

아이시스가 등장했다. 여성의 음성을 가진 아이시스는 또박또박한 발음을 구사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친절하지도 무뚝뚝하지도 않은 특이한 어투는. 여느 인공 지능들과는 확연히 다른 면이 있었다.

“헬로, 닥터 아이시스.”

“…….”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자인과는 달리. 무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홀로그램만 매섭게 노려보았다.

[ 그럼 시작하기 전에 바이오센서 장치를 착용해 주세요 ]

무사는 멀뚱멀뚱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밴드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안 할 거야?”

자인은 꼬은 다리를 풀더니. 척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이미 머리와 가슴에 센서가 달린 띠를 빈틈없이 두르고 있었다.

[ 무사 ·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군요 ]

“…….”

무사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고개를 몇 번 절레절레 흔들던 자인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무사의 미성숙한 태도를 깨끗히 묵살하고 싶어서였다.

한참 시간을 끌던 무사의 입에서.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소의 기분이 이런 걸까요?”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왔다. 자인은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까딱거리던 발목을 멈추고. 

‘저런, 미친!’

무사의 해괴한 물음에 허리를 곧추 세웠다.

[ 현대인은 가축을 도살장에서 도축하지 않습니다 ·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겁니까? · 근래에 게일 아이니츠의 처녀작인 <도축장>을 읽은 건가요? ]

“예방 주사 맞기 싫은데, 부모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향하는 아이의 심정과 비슷하다는 뜻이겠죠.”

자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더이상 무사의 허튼소리를 간과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라도 보여주는 듯했다. 그사이. 무사는 등이 후끈거리고 호흡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죄없는 쿠션이라도 좋으니 주먹 세례를 흠씬 퍼붓고 싶은.

‘크아악!’

파괴적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걸핏하면 하이재킹이지!”

“주사는 아프지만 결론적으로 질병을 예방하는 거니까. 죽어버리는 소랑은 그 본질부터 달라. 어떻게 당신은 부부 상담 치료를 그 소름끼치는 도축장에 비유할 수 있는 거지?”

“그만큼 개운하지 않다고!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든다고! 왜 내 입장은 전혀 생각해 주지 않는 거야?”

무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 무사 · 오늘 상담에서 불쾌한 감정의 원인을 찾아 보는 건 어떤가요 ]

“찾을 수 있겠어요?”

[ 물론입니다 · 상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바이오센서 장치를 착용해 주세요 ]

‘큰소리 땅땅 친다 이거지? 두고 보겠어!’

무사는 앞에 놓인 두 개의 밴드를 각각 머리와 가슴에 둘렀다. 어쩐 일인지. 닥터 아이시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수상했다. 평소의 그라면 시간을 더 끌었을 것이다. 터무니 없는 트집을 잡아서라도 말이다.

[ 앞서 말했지만 과거 상담 치료사의 접근 방식은 주로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 - 직관 -가족력 - 심지어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는 제외한 상태로 말입니다 · 그에 반해 현대 상담 치료는 심박수 - 혈압 - 땀 배출량 - 호흡 - 그리고 내분비 및 면역 기능의 수치를 분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합니다 · 잘 이해하셨으리라 믿고 지난 주에 토론했던 주제로 다시 돌아가 보겠어요 · 자인? ]

“자, 잠깐만!”

자인이 입을 떼려는 순간 무사가 가로막았다.

“왜 항상 자인이 먼저 하는 건가요? 이번엔 내가 먼저 해야겠어요.”

[ 상담 치료에 있어 순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 하지만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면 오늘은 무사가 먼저 시작하세요 · 자인 · 그렇게 해도 되겠죠? ]

“상관없어요.”

자인은 훅 하고 숨을 짧게 뱉고는. 양 손가락을 펼쳐서 눈썹을 매만졌다.

“봤죠?”

무사는 놀랍지 않냐는 듯 눈을 뗑그랗게 뜨더니. 퀭한 미소를 입가에 싸늘히 지었다.

[ 자인의 보디랭귀지에 기분이 상했다는 의미인가요? ]

“시작 전부터 날 무시하잖아요!”

[ 무사 · 일방적인 비난은 좋지 않아요 · 지난 상담 치료 시간에 우리가 했었던 훈련을 잊은 건가요? ]

무사는 양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힘껏 잡았다. 고개를 홱 뒤로 젖히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망할 놈의 훈련, 훈련, 훈련!’

한동안 물끄러미 천장만 응시하던 그는 슬그머니 자인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차피 지나가야 할 관문이었다.

“나는…… 당신의 작은 행동들로 인해 기분이 자주 잡치…… 아니…… 상하는 편이야. 왜냐면 차갑고 쌀쌀맞게 느껴지거든. 좀더 부드럽게 나를 대해 줄 순 없을까?”

[ 자인 차례입니다 ]

“내 행동이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유감이야. 하지만 별 뜻 없는 행동이었어.”

[ 좋습니다 · 비난을 삼가하고 ‘나’로 시작하는 진술을 통해 불만을 명시하도록 노력하세요 · 그 접근 방식은 비판단적이고 포용하는 자세를 수반해야 합니다 · 여기서 핵심은 기분에 중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 계속 진행할까요? ]

“나는 너무 행복할 것 같아. 만약 당신이 그 ‘별 뜻 없는’ 언행을 하기 전에 조금만 내 기분을 생각 해 준다면.”

“무사, 한편으로 나는 당신이 내 입장도 이해해 주기를 바래. 당신이 나의 관심을 잔소리로 오해하거나, 내 의견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 자인 · 관심과 의견의 예를 들어주세요 ]

“삼바트라에 관한 거에요.”

[ 닥터 파레의 처방에 문제가 생겼나요? ]

“닥터 파레의 처방은 적절했어요. 스트레스로 인한 복합적인 증상들이 다소 누그러진 것 같아요. 문제는 처방전이에요. 그걸 이용해 향정신성 약물을 구입할 수 있으니까요. 내 남편 무사가 그랬듯이.”

무사를 흘겨보던 자인은 곧장 말을 이었다.

“그 입수 경로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하지만 ‘우메르’라고 불리는 물건이 지금 이 집 어딘가에 있다는 거죠.”

눈을 내리깔고 있던 무사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 우메르를 발견했을 당시 기분이 어땠나요? ]

“솔직히 우메르가 어떤 약인지 몰랐어요. 겉포장도 삼바트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단지 아무 것도 명시되지 않은 무지 포장인 것이 이상했다고나 할까요?”

[ 감정 상태를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해 줄 수 있을까요? ]

“닥터 파레로부터 우메르의 기능과 작용에 대한 설명을 들은 이후…… 절망감을 느꼈어요. 배신감일 수도 있겠네요.”

[ 마지막 섹스는 언제였나요? ]

자인은 꽤 오랫동안 반으로 나뉘어져 있는 그들의 침대를 떠올렸다. 수면 습관이 판이하게 다른 둘은. 신혼 초부터 떨어져 자기로 동의했었다. 각자에게 최적화된 세팅에서 잠을 청해도. 기이한 잠버릇이 빈번히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주로. 무사는 이불을 걷어찼고. 자인은 잠꼬대를 했다. 특히. 자인은 별안간 웃거나 울거나 하는 경향이 비교적 잦았다. 그런 그들의 침대는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대체로 1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특별한 날이란. 둘이 육체적 사랑을 나누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삼십칠 일 전이었어요.”

내내 눈을 꾹 감고 있던 무사가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소리야? 기억 안 나? 지난 주에…….”

무사는 부릅뜬 눈을 희번덕이며 나지막히 쉬쉬거렸다.

“지난 주라고? 아하! 우메르랑 뒹굴었겠지!”

자인도 질세라 기를 쓰고 반박했다.

우메르는 도파민, 옥시토신, 바소프레신, 세로토닌 분비를 활성화시켜. 일종의 환각 효과를 일으키는 약물이었다. 육체적인 결합 없이도 강력한 오르가즘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마법의 약이었다. 개발자 미상의 이 의약품은 몇 년전부터 입소문을 타고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다(삼바트라와 동일한 비영구 타투 형태이기도 하다). 식품의약국의 허가를 받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블랙마켓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부작용이 속출했지만. 품절 현상은 계속 되었다. 삼바트라의 출시가. 우메르를 잡기 위한 고육책 중에 하나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언제부터인지. 우메르는 삼바트라와 맞교환하는 절차를 거쳐야만 구매가 가능했다. 결국. 우메르를 구하기 위해서는. 각각 개인 인공 지능 닥터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가짜로 호소해야 했다.

“뒹굴다니? 보기나 하고 그러는 거야?”

“우메르가 어떤 건지 다 알고 있다고. 그러니 바보 취급 하지 마.”

“그래서 타락이니, 추락이니 막말을 해 대며 내 혈압을 올렸구만!”

“당신의 기준에서는 덕행이고 비상인가 보지? 무슨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사고방식이 그 모양이야?”

“또! 또! 그 놈의 교육 타령! 내가 받은 교육이 어때서!”

“하등. 그것도 최하등.”

자인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부드러운 톤을 유지했지만.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금기 사항 중 하나인 ‘고함 지르기’가. 서슴없이 자행되고 말았다.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거실을 배회했다.

[ 서로에게 비판과 비난은 하지 않습니다 ]

아이시스가 중재역을 하고 나섰다. 그제서야. 자인과 무사의 노골적인 면박과 성난 힐난이 멎었다.

자인은 끝이 뾰족하게 다듬어진 손톱을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기다랗게 자라난 손톱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돌연한 상상이 불뚝 들었다. 

‘뻔뻔한 자식! 저 두꺼운 살가죽을 몽땅 벗겨 내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손가락이 옷소매 근처에서 평정심을 잃고 방황했다. 삼바트라의 손길이 그리웠다. 아니. 절실했다. 자인은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했다. 파도처럼 출렁대는 속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던 중. 넌지시 무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사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우두커니 창가에 서 있었다. 눈길을 모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인은 문득.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의 잘못만은 아니야. 그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그의 부모와 선생들의 잘못이 더 커. 그 중에서도…… 어린 아들의 삐뚤어진 생활 습관을 고치지 않고 수수방관만 한 그의 엄마가 가장 나빠!’

자인은 시원해질 때까지 책임의 불화살을 퍼부었다. 잔뜩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미간이 그나마 느슨해졌다.

[ 계속 이어 나가겠어요 ]

자인과 무사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던 긴장감이 약간 이완되자. 아이시스는 상담 치료를 재개했다.

[ 그전에 · 우메르의 소지 - 소유 - 사용은 불법 행위입니다 · 따라서 빠른 시간 내에 폐기 처분되어야 합니다 ]

“베델.”

자인이 베델을 호출하자. 무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메르를 처리해요.”

[ 현재 시간 오후 3시 27분 · 밀봉 후 코비 아일랜드로 보냈어요 · 자인 ]

코비 아일랜드는 각 가정과 연결된 폐기물 처리장이었다.

“베델, 방 청소 도중에 찾았던 거야?”

무사는 취조하듯 몰아붙였다. 친구라고 믿었던 자가 등에 칼을 꽂은 것만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 아니요 · 자인으로부터 정확한 지점을 고지 받았어요 ]

명랑한 베델의 음성이 왠지 서글프게 들렸다.

‘당연히 그랬겠지!’

무사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자신의 작업실 구석구석을 뒤적이는 자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개미핥기처럼 목을 구부정하게 앞으로 쭉 내밀고 킁킁대는 자태 말이다.

“명백한 불법 행위 아닌가요?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남의 물건을 뜯어 본 것은 큰 잘못이라구요!”

“당신 것인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거지? 샤워 부스 안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데, 내가 물건 주인을 찾아야 해? 그렇게 우기고 싶다면 합당한 이유라도 말해 보던지.”

“샤워 부스?”

“그래, 샤워 부스. 당신한테는 가장 로맨틱한 장소인가 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사는 마지막으로 우메르를 보았다고 생각한 곳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5일 전이었다. 무사는 루비와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나 삼바트라와 우메르를 맞바꾸었다. 우메르 딜러이자 공원 관리자이인 루비는. 가장 자연스러운 만남과 교환을 연출할 줄 알았다.

‘지난 주보다 비둘기의 숫자가 줄은 것 같군요. 산란기인가요?’

‘눈썰미가 좋네요. 암컷들이 산란기에 접어들면 따로 모아서 보살펴요.’

‘눈알이 오뚝하고 깃털이 들쭉날쭉한 것이 아직 어린 녀석 같군요.’

무사는 루비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비둘기 한 마리를 가리켰다.

‘오로라에요. 가까이에서 인사해 볼래요?’

루비는 손을 뻗어 어깨 가까이 갖다 대었다. 그러자. 오로라가 푸르르 날갯짓하더니 루비의 손목 위에 가뿐히 앉았다. 루비는 팔을 움직여 오로라를 무사의 얼굴 앞으로 옮겼다. 무사는 오로라의 발가락 사이에 걸려 있는 대롱 모양의 물체를 발견했다. 루비는 무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사가 기다리던 우메르였다. 그는 통대 안에 꽂혀 있는 돌돌 말린 물건을 꺼내기가 무섭게. 손에 쥐고 있던 삼바트라를 통대 안으로 쑥 밀어넣었다. 익숙하고 날렵한 손놀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로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오로라, 바이 바이하고 인사해.’

오로라는 말귀를 알아 듣기라도 한 것인지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기특한 녀석이었다.

‘바이 바이.’

‘그럼 다음에 봐요.’

루비는 다시 어깨 위로 오로라를 옮긴 후. 공원 어디론가 총총히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온 무사는 우메르를 복용할 기회만 엿보았다. 적의 동정을 들여다보듯이. 그러나. 생각보다 여의치 않았다. 비단. 환경 감사 보고서 제출 마감일이 코앞으로 닥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트루디의 개인 트레이닝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려댔고. 베델의 청소 로봇이 온 집안을 쓸고 다녔다. 게다가. 자인은 시시때때로 화상 통화를 이용해 그의 작업실을 들락거렸다.

‘그래, 샤워 부스야 말로 나만의 시간을 조용히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지. 슬프지만 이게 나의 개 같은 현실이라구!’

무사는 목뒤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혈압이 치솟고 있음을 담담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 무사 · 불쾌한 감정의 원인을 찾았나요 ]

찍소리도 하지 않고 있던 아이시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상담 치료 시작 전부터 장담을 하더니. 완전 헛소리는 아니었다. 역시. 인공 지능 다웠다.

“찾았죠! 이 넓은 집구석에서 프라이빗한 공간이라곤 샤워 부스 밖에 없다는 사실이 정말 통탄스럽군요!”

무사는 목청을 높이며 팔까지 훼훼 내저었다. 자인은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잠시나마 가련하다는 생각을 품었던 내가 돌았지!’

눈알을 떼구루루 굴렸다. 결혼 생활은 커다란 틀의 고문. 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요 · 무사 ]

무사는 휘젓던 팔동작을 멈추고. 아이시스의 홀로그램을 쏘아보았다. 

창백하다 못해 회색빛이 감도는 피부.

길고 풍성한 은빛 머리칼.

색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커다란 눈동자.

하얀 입술.

푸른 깃털로 덮인 유니폼.

아이시스의 머리 위에는 황소 뿔을 닮은 머리 장식물이 씌어 있었다. 중앙에 부착된 수정 구슬은 색과 모양의 패턴이 시시각각 다르게 변했다. 전혀 깜박이지 않는 아이시스의 눈과는 달랐다. 생명 없이 보이는 외형과 정반대로. 매우 살아 있었다.

[ 오늘의 상담 치료는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 시간에는 ‘건강한 경계선’에 관해 대화하기로 하겠어요 · 상담 분석 결과는 24시간 내로 전달하겠습니다 · 좋은 하루가 되길 바라며 · 굿바이 ]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던 상담 치료가 드디어 끝났다. 자인과 무사는 제각기 머리와 가슴에 두르고 있던 바이오센서 장치를 풀었다.

“무척 고마워. 패대기치니까 속이 후련하지?”

무사는 비아냥댔다. 그는 격투기 선수처럼 목을 좌우로 꺾으며 양주먹으로 원투 펀치를 공중에 날렸다.

“트루디!”

트레이너 트루디와 한판 붙을 기세였다. 아이시스의 상담 치료 후. 반드시 거치는 통과 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맨날 얻어 터지면서 왜 하는 거야?”

자인은 쯧쯧 혀를 찼다.

“맨날이라니?”

“15전 15패가 완패가 아니라구?”

“왜 이래? 2무 13패야.”

“그거나 이거나.”

자인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베델, 핑크 로즈 레모네이드 차를 준비해 줘. 뜨거운 걸로.”

[ 그럴게요 ]

자인은 성큼성큼 트레이닝 룸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무사를 곁눈질했다.

‘보나마나 뻔하지. 당신은 오늘도 참패야.’


*

[ 무사 · 요구대로 웨이트 트레이닝 대신 스파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장비를 갖추겠습니다 ]

무사는 입고 있던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신체 전체를 감싸는 형태의 보디 슈트를 입었다. 보디 슈트는 수천 개의 센서가 장착된 특수복으로. 입고 있는 사람의 세세한 움직임과 모든 공격 포인트는 물론이며. 상대의 타격 또한 실제 상황과 거의 가깝게 전달했다. 가상 현실 속 스포츠를 즐기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무사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복싱화 끈을 단단히 묶었다. <에픽 팔콘 2020> 모델인 복싱화는 한정판 클래식 스타일로. 지난해 자인에게서 받은 생일 선물이다.

[ 준비되었습니까? ]

“덤벼!”

[ 카운트다운을 하겠습니다 · 5 · 4 · 3 · 2 · 1 ]

<계속>

닥터 아이시스 (1)

현관문이 스르륵 열리자. 

[ 어서 오십시오 · 무사 ]

인공 지능 센서는 알아서 인사를 했다. 집 건물의 보안을 담당하는 ‘아심’이다. 배꼽 아래에서 끌어올린 듯한 중저음의 어투.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못해 단호하게 들릴 정도였다.

[ 외출하신지 2분 13초만에 돌아오셨습니다 ]

무사는 대꾸도 생략한 채 서둘러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급한 손길로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책상 서랍, 컴퓨터, 커피 머그, 액자, 회전 의자…….

가전 기기 하나하나는 물론이고. 방 구석구석을 손가락으로 싹싹 훑었다.

“왜 다시 온 거야?”

자인이었다. 무사는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지었다.

“왜 — 돌-아-왔-냐-구.”

자인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주 느린 속도로. 무사는 왼쪽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켰다. 

“으음!”

무사는 빠르게 번지는 통증에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오른쪽 무릎이어야 했는데. 현재 그의 왼무릎은 홀로 90킬로그램의 육중한 몸무게를 견딜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또. 깜빡 잊고 말았다. 바보처럼.

“트루디의 말을 들었어야지. 결국은 닥터 파레가……”

“잊고 나간 게 있어서.”

무사는 자인의 말을 툭 끊었다. 자인이 하려던 이야기는 새로운 정보도 뉴스도 아닌.

‘틈만 나면 설교질!’

되풀이되는 조언에 불과했기에.

“다 자란 어른을 내가 가르쳐야 할 이유는 없지. 알아서 해.”

“왜 그렇게 삐딱한 건데?”

“삐딱? 내가 뭘 삐딱하게 말했지? 마흔 살 넘은 남편을 부인이 지도하지 않겠다는 게 삐딱한 거야? 교육은 부모와 학교로부터 받았어야지.”

“자꾸 파고 들 거야? 여기서 교육 얘기가 왜 나와?"

“심사가 꼬여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게 뒤틀려 보이고 들리기 마련이야.”

무사의 양 콧구멍이 넓게 벌어졌다. 그는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격한 감정을 간신히 삼켰다. 자인은 덥석 문 말꼬리를 절대 놓는 법이 없었다. 투쟁 본능이 강한 핏불 테리어와 똑같은 피가 혈관에 흐르고 있는 것인지. 그녀의 대화법은 종종 무사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무미건조한 기계음을 닮은 자인의 말투도 적지 않게 한 몫 했다). 자인은 눈앞으로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환하게 드러난 그녀의 두 눈은. 덤빌테면 덤벼보던지! 하고 가느다랗게 지저귀었다.

“베델!”

무사는 ‘베델’을 호출했다. 가급적이면. 자인의 경멸에 찬 눈초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었다.

[ 굿 모닝 · 무사 ]

특유의 밝고 활기찬 음성. 베델은 집안 일 담당의(청소, 요리, 빨래 등) 스마트 가전 제품을 작동하고 관리하는 인공 지능이다. 무사는 집에 프로그램 되어 있는 의인화된 인공 지능 중 베델을 가장 좋아했다.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상냥하고 유쾌하기에. 더군다나. 베델은 무사의 어떤 요구에도 토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센스 있게.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베델, 오늘 저녁으로는 햄버거가 먹고 싶어.’

‘앞서 여덟 번을 식물성 고기 패티를 썼는데, 이번에는 진짜 고기 패티로 할까요?’

‘너무 좋지! 역시 베델이야!’

콜레스테롤 수치와 복부 지방의 상향 곡선을 부르짖거나. 고리타분한 권고를 일삼는 ‘닥터 파레’나 ‘트레이너 트루디’와는 상당히 달랐다. 꽉 막힌 그 둘과 비교했을 때 베델은 유연했다. 무사와 적당한 타협도 곧잘 하고. 심지어 가벼운 농담도 주고 받았다.

“베델, 이 방을 마지막으로 청소한 게 언제지?”

[ 어제 오전 11시 21분이었어요 · 무사 ]

“그렇다면 아직 오늘은 청소를 하지 않은 거지?”

[ 청소는 주말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금요일 11시 이후에 한답니다 · 청소 시간을 조정할까요? ]

“아니야. 그냥 확인할 게 있어서 물어본 거야. 평소 스케줄 대로 해.”

[ 그럴게요 · 무사 ]

“뭘 찾고 있나 봐?”

“신경 꺼.”

 무사는 음침하게 다가오는 자인의 물음에 이마를 찌푸렸다. 쾌청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내려앉는 것처럼. 그의 기분이 쭈글쭈글 금세 암울해졌다.

“남편의 타락한 정신 상태를 알아버렸는데 신경을 끄라구? 난 당신의 부인이야. 추락하는 한 인간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자격이 있어.”

“우우우욱!”

끙끙 앓는 듯한 소리가 무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양주먹을 불끈 쥐고 방안을 이리저리 종횡했다. 반면. 무표정한 자인의 얼굴에는 야릇한 온화함이 감돌았다. 그녀의 번뜩이는 두 눈은 씩씩거리는 무사의 움직임을 조용히 뒤쫓았다.

“타락? 추락? 벌써 아이시스의 주의를 잊은 건 아니겠지!”

“하! 설마.”

자인과 무사의 부부 싸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던 작은 다툼은. 해를 거듭할 수록 격렬한 언쟁으로 발전했고 그 횟수도 부쩍 잦아졌다. 그렇다고. 둘 사이에 딱히 큰 분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성격 차이’를 핑계 삼아 서로를 헐뜯고 씹어대다 보니. 지켜야 할 선이 와르르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둘은 ‘부부 상담 치료’라는 종착역에 다다랐다.

자인은 입고 있던 스웨터의 왼쪽 소매를 쓱 걷어올렸다. 그녀의 손목 위로 복잡한 회로 모양의 금빛 타투가 드러났다. 7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문신은 신체에 부착할 수 있는 스티커형었다. 이 비영구 타투는 피부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화학 물질을 체내에 침투시켰다. 최근. 의료계에서 출시한 가장 획기적인 아이템 중 하나로. 맞춤형 건강 관리를 맡은 인공 지능인 닥터 파레가 스트레스에 취약한 자인에게 추천한 약품이기도 했다. 

자인은 팔에 붙은 회로 디자인을 찬찬히 살폈다. 전체적으로 금색인 회로는 드문드문 회색이 섞여 있었다. 점과 점을 잇는 라인 하나를 골라서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금줄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굳었던 목과 어깨 근육이 서서히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입으로 내쉬었다.

“닥터 아이시스야. 우리의 상담 치료 전문가라고. 내일 세 시. 잊지마.”

눈을 뜬 자인은 소매를 당겨 내렸다. 그리고 무사의 작업실에서 나갔다.

<계속>

비행 원숭이 조련사 (5)

“책 어땠어요? 신비하고 다채롭죠?”

만나자마자. 그녀가 쪼르르 달려왔다. 못보던 사이에. 다소 핼쑥해진 것도 같았다. 나는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옆구리에 단단히 끼어 있는 퍼즐 책이 보였다. 얼마나 풀어댄 것인지. 책 가장자리가 나달나달했다. ‘퍼즐 광’ 정도로는 충분치 않을 듯했다. 요즘 말로 ‘덕질의 끝판왕’ 급은 되었다.

“복잡한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느낌 아니던가요? 나름 긴장감도 흐르죠? 스릴러물도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괜찮았어. 좋은 책 추천해 주어서 고마워.”

차마. 완독하지 못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경쟁이라도. 질 수 없었으니까. 결단코. 

“정말요?”

“그럼.”

flying-monkey-in5.png

나는 최대한 짧고 명확하게 응답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크래커에 치즈를 얹어 먹었다. ‘대화 단절’의 의지를 시사하는. 나의 배려였다.

“그런데 저스틴 브라우닝, 제대로 쓰레기 아닌가요?”

나는 입 속에서 뒹굴던 크래커와 치즈를 꿀꺽 삼켰다. ‘예스’라고 해야 할지, ‘노’라고 해야 할지. 혀끝에서 에돌기만 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토록 입 아프게 알려 주는데도, 반성이란 없잖아요.”

“으흠!”

나는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옆에서 눈 뜨고 당하기만 하는 인물들이 너무 안쓰럽고 딱하더라구요.”

“그치…….”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입을 닫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 했다.

“나한테 걸렸으면, 진작에 게임오버였을 텐데. 이래 뵈도 내 분야에선 킬러로 통하거든요.”

왜 그랬을까. 별안간. 소설 속 구절이 물결처럼 너울거렸다.

엘렉트라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녀의 빨려들어 갈 듯한 커다란 눈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눈을 들어 그녀를 흘겨보았다. 지금. 내 앞에 떡하니 앉아 있는. 그녀의 눈과 몹시 흡사했다.

“전부터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많이 궁금했잖아요. 인간 체험. 이젠 아셨죠? 별 거 아니에요.”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그녀는 몸을 푹 수그렸다. 그리고.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저스틴 브라우닝. 백만 년 만에 재회한 쌍둥이 형제 같지 않은가요? 상봉을 축하해요. 내가 찾아내느라 힘 꽤나 썼어요. 당신의 과거와 미래를 수도 없이 들쑤셔야 했거든요.”

“무, 무슨…….”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장난질 금지. 구어체로 깩소리 말고 얌전히 있으라구요. 이혼 후 쪽박신세 되는 거에 안 그치고, 하나뿐인 아들까지 잃고 싶지 않으면 말이에요.”

그녀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마치 독이 오른 벌레의 울음소리 같았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휙 틀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말도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혓바닥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온갖 노력을 다 하셨던데. 우와, 깊은 감동. 그런데 어쩌죠? 나 못 이길텐데. 말했잖아요. 나 킬러라고. 미래에서 온 나르시시스트 킬러. 그러니까 비행 원숭이 조련사 짓은 빨랑 접으세요. 잘 알아 들었죠, 미스터 나르시시스트?”

“…….”

나는 벙어리 행세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놀란 비둘기처럼. 벌떡벌떡 뛰는 가슴을 가라앉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망이질을 해대는 어리석은 심장은. 좀처럼 잔잔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돌연히 발생한 상황에. 사지마저 달달 떨렸다.

“아 참! 말한다는 걸 까먹고 있었는데, 그 책 내가 썼어요. 어때요? 이젠 앞뒤 아귀가 귀신같이 맞아떨어지죠?”

그녀는 퍼즐 책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겉표지에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나르시시스트 정복>이라는 제목이. 나를 향해 히죽히죽 비웃었다.

<끝>

비행 원숭이 조련사 (4)

나는 두 번째 포장지를 뽑아 들었다. 이번에는. ‘예술’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보기로 했다. 색깔도 은은한 파스텔 계통이 딱일 것 같았다. 봄비를 맞고 부풀어 오르는. 꽃망울 같은 느낌을 연출해야 했다. 터질 듯 말 듯. 간질간질 조바심이 일어나게 말이다. 서둘러 각본을 쓰고 캐스팅을 진행했다. 역시나. 동생 녀석이 주역으로 낙점되었다. 그녀는 완미의 경지에 이른 걸작품을. 감상만 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플롯’을 짰다.

1. 내가 속한 그룹에 가입시킨다. 단. 포지션은 ‘내 동생’에 준한다.

2. 동생의 역량이 통할 경우. 무임승차한다.

그렇다고 평생 깔고 뭉갤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에만 배팅을 할 수 없었다. ‘플랜 B’는 필수였다.

3. 동생의 역량이 통하지 않을 경우. 하차한다.

기본 강령이 세워졌다. 그동안 갈고 닦은 연습과 훈련이. 빛을 발할 때가 되었다. 리모트 컨트롤 버튼을 신나게 눌러댈 기대감에. 가슴 한구석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먼저. 준비한 극본 대로 모든 모임에 동생 녀석을 달고 갔다.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만남이든. 가리지 않았다. 나의 인맥을 총동원한다는. ‘순수한 의도’를 각인시켰다. 대신. 사용료는 지불해야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던가. 마침. 동생은 잔눈치에 매우 밝았다. 흔쾌히. 운전사, 요리사, 가정부, 매니저, 비서의 역할을 자청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하고 따지고 드는 대사는.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삐딱한 태도였다. 강요는 일절 없었다. 순전히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딴 세상’에 발을 들인 동생의 가슴에. 서서히 진한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flying-monkey-in3.png

“창작에 몰두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래? 아이디어는 있고?”

“전부터 구상만 하던 게 있긴 하거든……. 근데, 형. 내가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못 할 게 뭐가 있어? 첨부터 예술가 명함 물고 태어나는 사람 있냐?”

동생 녀석의 섣부른 의욕에 불을 붙여야 했다. 활활. 그래야만 ‘무임승차’가. 하루 속히 실현화될 수 있었다(동생이 이루고 싶은 분야가 내 오랜 꿈이었기에.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앞으로 열심히 하기만 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해 줄 테니까.”

“고마워, 형. 이 악물고 끝까지 갈게.”


끝까지.

나는 이 대목에 주목했다. ‘충성 맹세’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승리의 깃발을 흔들 시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들었냐? 네 남편이기 훨씬 이전에 내 동생이야. 맘대로 껴들 수 없는 게 우리 둘 사이라고!’

‘신봉자’에 이어. ‘귀의자’까지 얻었다고 생각하니. 입이 째졌다. 

동생은 다짐한 대로 ‘창작’에 전념했다. 낮이고 밤이고. ‘구상 단계’에 머무르던 아둔한 씨앗에. 싹을 틔어 보려고 몸부림쳤다. 비록. 허황된 망상일지라도 말이다. 더 유쾌한 일은. 그녀가 응원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으쓱으쓱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확성기를 들고 “내가 참된 위너다!” 하고 외치고 싶었다. 우월감에 젖어 드는 기분만큼. 행복한 것이 없었다. 최고였다.

나라는 탁월한 인재가. 거기에서 그칠 리가 없었다(괜히 주춤거렸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까). 이럴 때일 수록. 더욱 대담해져야 했다. 칼을 빼든 상황에서. 종이라도 베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 여자는 누구야?”

“추종자.”

“뭔 소리야?”

“지가 좋다고 나대는 골 빈 애야.”

“형, 설마…….”

“내가 돌았냐? 얌마, 쬐끔 받아주는 거 뿐이야.”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과정 중 하나였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기 위한. 불가결한 절차였다. 나는 동생 녀석의 ‘추종자’가 될 만한. 여인들을 엄선했다. 밝혀도, 멍청해도 탈락이었다. 상당한 지적 수준과. 뛰어난 유머 감각을 갖추어야 했다. 겉보기엔 느릿느릿 곰 같은 녀석이. 생각보다 엄청 까다로웠다. 성형 수술 중독녀, 흡연 애호녀, 입방정 가십녀 등등. 하찮은 명목으로 접근하는 족족 냉랭하게 굴었다. 한술 더 떠서. 왼손 약지에 둘러진 반지로 방패막이를 하려 들었다. 오히려. 내가 결혼 반지를 끼지 않는다는같잖은 이유로. 역정까지 냈다.

‘젠장! 호강에 겨워 까불고 있네!’

그녀를 만난 이후. 미각만 훌쩍 발달된 것 같았다. 싸구려 입맛에 길들여져 있던 녀석이. 어느새 미슐랭 가이드 별점이나 따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대책을 궁리해야 했다. 

‘들키면 온 동네 망신살로 그칠 리 없지.’

눈을 까뒤집고 덤비는. 와이프의 소름끼치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어설프게 밀고 나갔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일단. 동생 녀석을 위한 ‘추종자 모집’은 보류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유연하게 대응했다.


더 늦기 전에. 세 번째 포장지를 마련해야 했다. 나는 적합한 레이블과 컬러를 강구하는 것에. 온 신경을 모았다. 밤낮으로 머리를 굴렸다.

“집에 혼자 있을 땐 주로 뭐 하냐?”

“별 거 안 해. 영화 보고, 음악 듣고.”

“그게 다야? 들었는데, 쇼핑 같은 것도 관심 없다며?”

“응. 시간 아깝다고 싫어해.”

“영 심심과네.”

“정작 본인은 하나도 안 심심해 해. 어쩌다 퍼즐 같은 거 붙들면 하루종일 하고 그래.”

퍼즐. 동생 녀석 말에 의하면. 낱말, 숫자, 그림 맞추기 등. 그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그깟 지적 만족도나 얻으려고. 여가를 십분 활용하는 별종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잡식성이었다.

‘그래봤자 급급한 발버둥질 아니겠어? 자기만족에 사로잡힌 루저의 발악.’

“그래도 항상 고마워. 나를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으니까.”

“…….”

“누가 그러는데 도를 닦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어서 내가 성공해야지.”

“…….”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는 동생 녀석의 실적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훌륭한 조력자의 자세가. 형편없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열등생의 초라한 성적표를 마주하는 듯했다. 파괴적인 퇴화 현상의 조짐을 보였다. 기합이 잔뜩 들어도 될똥말똥한 시기에! 궁극의 처방이 내려져야 했다.

‘특수 포장지를 써먹을 때야!’

정해진 표 딱지와 색은. 더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카멜레온이 되는 수 밖에.’

주위의 환경과 온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는. 못생긴 파충류의 특성을 흉내내기로 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바로바로 작전을 가동시켜야 했다.

“요즘 자주 피곤하다고 그러네.”

그녀의 컨디션이 나쁜 것 같다며. 동생은 퉁퉁한 얼굴에 걱정의 빛을 띄웠다. 최근 부쩍 늘어난 ‘인간 체험’ 업무에. 불만이 가득했다. 신속히 동생의 이목을 옮겨야 했다. 그녀로부터 내게로.

“지난 주에 정기 검진을 했는데, 찜찜해 죽겠다.”

“왜?”

즉시 먹혀들었다. 

“요즘들어 아랫배가 자주 아프고, 가스가 차는 게…….”

“큰 병은 아니겠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내일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인데. 만에 하나 중병이면…… 휴…….” 

나는 의미심장한 눈짓을 흘렸다. 이렇게. 동생이 하나를 내밀면. 나는 둘을 내놓았다. 이것이. 카멜레온 전술이었다. 나의 전략은 적중했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동생은 내 주변에서 빙빙 맴돌았다. 보이지 않는 인력에 이끌려. 공전과 자전을 되풀이했다. 차츰차츰. 동생과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간극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옳지! 넌 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란 걸 잊지마!’

외야의 펜스를 넘어가는 ‘굿바이 홈런’이. 점차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형, 전생 체험이라고 들어 봤어?”

“그게 뭔데?”

“최면 요……”

“아, 뭔지 알아. 최면으로 전생을 들여다보고 그러는 거?”

“아는구나.”

“근데 왜?”

동생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미스터 브라우닝>이라는 타이틀의 소설책이었다.

“무슨 내용이야?”

“나도 읽다 말았는데, 흥미롭긴 하더라고.”

“흥미진진이라…….”

나는 책장을 후드득 넘겼다.

“옆에서 하도 재밌다고 노래를 불러서 시작은 했는데. 형, 알잖아. 나 책하고는 사이 별로인 거.”

그녀의 추천 도서. 으레 확인해야 했다.

“그럼 책벌레인 내가 읽어 볼까?”

나는 책을 기꺼이 받아 들었다. ‘A Guy Who Had Many Names’라는 부제로 보아. 외국 도서인 듯했다. 첫 페이지를 펼쳤다.

무의식을 의식하게 될 때까지 무의식은 우리 삶을 지배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어쭈구리!’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의 인용구까지 정성스레 써 넣어져 있었다.

‘뭘 이리 첫 장부터 고매하고 심오한 체 하는 거야?’

나는 콧방귀를 탁 뀌었다. 

‘그래도 읽어는 봐야지.’

그랬다. 적을 알고 이편을 알면 백전. 이라는 명언이 있듯이. 이 대결에서 길이 남을 위대한 승전보를 남기기 위해서는. 그녀의 뇌 구석구석을 헤집어 보아야 했다. 병법의 기본이 아니던가. 나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부지런히 넘겼다.

낚시질은 생각보다 훨씬 수월했다. 처음부터 대어가 쉽게 낚였다. 입질이 왔을 때 느껴지던 손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지!

나도 모르게. 빙그레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소설 속 주인공 ‘저스틴 브라우닝’은 나와 닮은 면이 있었다. 초반부터. 끈끈한 전우애 같은 감정이 피어났다.

나는 태생이 수나비란 말이다. 이 운명의 덫에 그녀가 덥썩 걸려든 것이 화근이었다. 

특별히.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흡족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독서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속도를 내었다.

‘춤추는 문어발’쯤이야 아주 가뿐하지. 나무에 열린 풋사과들을 영글게 만드는 것은 관심과 사랑이니까.

감동적이었다. 눈물까지 찔끔 자아내는 뭉클한 문구에. 나는 굵은 밑줄까지 쳤다. 나와 비슷한 놈이. 소설 속 세계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놈과 만나면 얼싸안고. 밀린 회포라도 풀고 싶었다.


엘렉트라는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짚고는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브이(V) 자로 깊게 파인 가운 사이로 부풀어 오른 그녀의 젖가슴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읽어 내려갈 수록. 형체도 없는 여주인공의 자취가. 나비처럼 날아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작가는 멀쩡한 사람을 흥분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나는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엘렉트라’ 같은 여인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홀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인공 수정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이라도 엄연한 당신의 핏줄이죠. 게다가 사정한 정액은 당신의 마지막 선물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엘렉트라의 못된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그녀의 사악한 혓바닥을 한입에 삼키고 싶었다.

‘이것 봐, 이것 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솜씨가 상당했다. 알싸한 매운맛을 거침없이 구사하는 모양새가. 자극적인 사고력을 품고 있는 ‘어둠의 형제’ 같았다. 

동생 녀석의 책 소개 대로였다. 주인공 놈은 기억에도 없는 전생을 헤매며 쏘다녔다. 기원전 1억 6671만 년 전을 위시해서. 16세기 튜더 왕조 시대와 13세기 자야바르만 7세 시대를 아우르는 해괴한 여행을 하느라 바빴다. 심지어. 아메리칸 인디언의 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에 비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사건도 아니었다. 숱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운 숫자들 앞에는 파산을 암시하는 마이너스 부호가 못된 뿔처럼 달려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눈물이 눈앞을 붉게 물들였다.

‘원! 투! 스트레이트!’

앞부분에서 어머니를 잃은 것도 부족했는지. 이제는 파산 직전에 몰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한방에 훅 간다는 게. 진정 이런 것인가 싶었다. 덩달아. 주인공 놈의 인생이 가엾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분명히. 첫 맛은 달았는데 갈수록 씁쓸해졌다. 나는 책을 덮었다. 웬일인지. 읽기가 싫어졌다. 끝내려면 반이나 남아 있었지만. 끝끝내.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계속>

비행 원숭이 조련사 (3)

나는 심사숙고 끝에. 

첫 번째 포장지를 엄선했다. ‘겸손’이라는 딱지가 붙은 포장지였다. 색상도 무채색으로 정했다. 그녀와 ‘코드’를 맞추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오래된 습성에서 나오는 사회적 행동이 아니던가. 

“어제 난 기사 보니까 수상 후보에 올랐던데?”

“으응…….”

“와! 대단하다!”

“뭐가. 그깟 상. 다 주는 건데.”

“아무나 막 주겠어? 그래도 상인데.”

“아냐.”

나의 반응이 시큰둥할 수록. 식구들은 더 크게 떠들어댔다.

“상금 있어?”

“그런 거 없어.”

“에이, 아무려면!”

“없다고.”

나는 잘라 말했다. 돈에 관한 주제라면. 싹눈부터 뜯어 내야 했다. 돈도 없었지만. ‘가난한 예술가’라는 프레임을 벗어던질 단계가 아니었다. 멀고도 멀었다.

“얼마나 주니? 그래도 한 돈 백은 주겠지? 야, 뭐든 보상이라는 게 있어야지. 니가 얼마나 고생해서 하는 건데.”

그러나. 눈치 없는 어머니는 멈출 줄을 몰랐다. 머릿속에 돈꽃이라도 만개한 것인지. 허구한 날 돈타령이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턱에 힘을 꽉 주었다.

“오늘 저녁에 뭐 해 먹을까요?”

일명 ‘개코’의 소유자인 와이프가 수습에 나섰다.

“글쎄, 맛있는 게 뭐가 있을까?”

“아무거나.”

“나도 상관 없어.”

“나도.”

언제나 그렇듯. 간단한 결정 하나 내리지 못하고. 떠넘기기 바빴다. 결정장애. 우리 식구의 화끈거리는 민낯이었다.

“만두 어때요? 손만두. 만들어 본 적은 없는데, 재미있을 거 같아요.”

내내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 있던. 그녀가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그렇지! 잘 한다!’

깔끔한 결단력. 앞으로. 내 공식에 꾸준히 대입해야 하는 ‘수치’였다. 그러면. 근사값을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

flying-monkey-in4.png

내 예견이 적중했다. 생각보다 순진한 그녀는. 판만 깔아 주면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더불어. 결정장애로 중무장된 식구들은 그녀의 지휘봉에 자연스럽게 휘둘렸다. 손 끝 하나 대지 않고 코 푸는 맛이 쏠쏠했다. ‘리더’의 계급장을 단 그녀는. 내가 그려넣은 발자국을 따라 고분고분 스텝을 밟았다. 만물의 이치를 글로 배운. ‘헛똑똑이’의 표본을 보는 듯했다.

“처음 치곤 굉장한데?”

“그래요?”

“소질을 타고 난 것 같아.”

“정말요?”


큰 그림의 완성을 위해서는. 칭찬을 처발라야 했다. 그녀가 나를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완벽하게 인정할 때까지. 고삐를 늦추어선 안 될 일이었다. 다시 말해. 암묵적인 협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우주의 순환 법칙엔 일방통행이란 없지!’

나는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일 수가 있었다. 시험 가동 삼아. 어리바리한 동생 녀석을 타겟으로 삼았다. 

‘어차피 나의 영원한 기니피그야. 어쩌면 그것이 네 인생의 참된 목적일 줄도 모르지. 알겠냐, 동생아?’

참된 목적. 이미 동생의 잠재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11살. 동생이 8살 때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나는.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안 들어 가고 뭐 해?”

“엄마 없어. 문도 잠겼어.”

“그래? 곧 돌아오시겠지.”

나는 가방을 벗고 현관 앞 계단에 앉았다.

“형…….”

“왜 그래?”

“나 똥 마려.”

“참아.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잖아.”

“급해. 쌀 거 같아.”

그 순간. 머릿속에서 번쩍하는 발상이 솟아올랐다.

“그래? 할 수 없지. 가방 이리 주고 저기 가서 싸.”

나는 손가락으로 옆집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보면 어떡해?”

“내가 여기 앉아 있는 한 길에선 너 안 보여.”

“진짜?”

“배우지 않은 넌 모르겠지만 원근법이라는 게 있어. 하여튼 안 보이니까, 걱정 말고 가서 싸.”

내 말을 ‘주님의 말씀’처럼 믿은 동생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옆집 앞에 자리를 잡고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똥을 쌌다. 

30년도 넘은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엉터리 ‘원근법’이 통할 줄이야!’ 

나는 솟구치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머지않아 마흔 줄에 들어서지만. 예나 지금이나 동생은 한결 같았다. 내가 하는 말이라면 맹목적으로 믿었다. 쳐 놓은 덫에 걸려든 줄도 모르는. 미련한 멧돼지 같았다. 즉.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에 있어 막힘이 없었다. 복이라면 복이고.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더욱 확실한 것은. 나는 어릴 적부터 ‘깜냥이 있던 놈’이라는 진리였다. 

나는 테스트에 박차를 가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동생 앞에서 아티스트의 그윽한 내면을 연기했다.

예술적 고뇌, 불안한 미래, 불합리한 사회 구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철학적으로 접근하려고 애썼다. 마침내. 주 5일 출퇴근의 대가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던 동생 녀석이. 꿈틀하기 시작했다. 

‘브라보!’

녀석의 폐부에. 예술의 혼을 흠씬 불어넣을 틈새가 보였다.

“넌 은퇴하면 뭐 할래?”

“글쎄……. 모아 놓은 은퇴 자금이나 타서 먹고 살겠지. 가끔씩 골프나 치고.”

“남들과 똑같이 먹고, 싸고, 자고, 놀고. 그런 인생 의미없다. 우리가 그러려고 태어난 게 아니거든.”

“형, 안 그래도 요즘 갑갑해.”

“뭔데 그래? 말해 봐.”

동생 녀석은 직장인이 겪는 답답함을 호소했다. 봉급생활자의 무기력증과 우울감에 대해 토로했다.

‘똥방구 끼고 앉았네! 니가 돈 없는 게 뭔지 모르는구나!’

절절한 헛소리에.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래도. 인내심으로 버텼다. 시작부터. 신성한 설계도에 똥칠을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동생의 허파는 풍선처럼 팽팽해지고 있었다. 이쯤이면. 거의 넘어오고도 남았다. 그러나.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왜냐. 동생 녀석 뒤에는 항상. 그녀가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이트 컬러의 비애이지.”

“화이트고 블루고 간에, 어쩔 땐 확 도망치고 싶어.”

‘빙고!’

동생 녀석은 은연 중에. 해방과 탈출을 부르짖었다.

“자유롭고 싶구나.”

나는 곧장 ‘설교’에 착수했다. 주옥같은 복음의 나팔수를 자청했다. 주제는. 인간 세계의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이었다. 

무위자연설, 관심의 법칙, 힐링 에너지, 양자 물리학, 고차원의 세계…….

알아먹든 말든. 동생 녀석의 막귀에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사고의 규격화를 위해서는. 주입식 교육만큼 알맞은 것이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정한 표준에 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동생은 사직서를 던지고 회사에서 나왔다.

“꼬박꼬박 월급 타 먹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왜 그걸 걷어차고 나와!”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려고 그랬대?”

“요즘 같은 때 외벌이로는 못 살아. 맞벌이를 해도 죽겠는 판국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런 거야? 옆에서 꼬드기는 친구라도 있었던 거 아냐?”

식구들은 제각기 앞다투어 한마디씩 해 댔다. 여하튼. 도움이 되질 않았다. 깽판이나 치지 않으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눈을 돌렸다. 그녀는 떠들어대는 식구들 틈바구니에서.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아무 감응도 없는 듯. 시종 무표정했다. 흔한 추임새조차 넣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던 그녀가. 드디어 침묵을 깼다.

“백 세 시대 잖아요. 직장 생활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평생 직업을 미리 찾는 게 현명한 걸지도 몰라요.”

과연. 명대사였다.

‘아멘!’

공을 들인 효과가 있었다. 그녀의 호감을 샀을 뿐만 아니라. ‘신뢰’와 ‘신망’ 등의 찬양이 남발하는높은 평가가 매겨졌음이 틀림없었다. 대단히 고무적인 출발이었다. 

‘협상이 이런 거야. 내가 널 우쭈쭈 해 주면, 넌 나를 곧이곧대로 신봉하는.’

나는 살그머니 쾌재의 미소를 띄워 올렸다. 속사정까지 일일이 알 수는 없어도. 동생의 탈선을 그녀가 받아들였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포용성에 경의를 표했다. 또한 그 관용과 이해는. 그녀의 고액 연봉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죄책감’ 따위는 상실해야 했기에. 튼튼한 가정 경제는 절대 전제 조건이었다). 

<계속>

비행 원숭이 조련사 (2)

나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동생 녀석과 그녀는 결혼을 했다. 꽤 성대한 결혼식을 치뤘다. 약혼 여행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신혼 여행도 유럽으로 갔다. 돌아와서는 차도 샀다. 그것도 중형차였다. 

‘월세 주제에 무슨 차야? 분수를 알아야지!’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집도 장만했다. 인생 선배의 ‘가르침’을 무색하게 했다. 모든 게 내 기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flying monkey-in2.png

“얼마나 버냐?”

“그냥, 뭐…….”

쉽사리 입을 열 분위기가 아니었다.

“억 대는 버나 보지?”

“일 오래 했잖아.”

나도 내 분야에서 20년 이상은 굴렀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경력의 길이와 돈벌이는 별개의 문제였다. 동생 녀석의 우물거리는 꼴을 보아. 벌이가 괜찮은 게 분명했다.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나에게는 중요한 사안이었으니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던 것은. 동생의 행색이었다. 누가 봐도 특징이 없고 무난하던. 동생의 외모에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출발은 헤어스타일이었다. 밋밋한 회사원에서 반 연예인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예술인이라는 명분 아래 단발머리를 고수하던 나는 혀를 깨물어야만 했다.

동생의 일탈은 계속되었다. ‘튀는’ 옷도 과감하게 입기 시작했다. 스키니진은 물론이고. 특이한 디자인도 너끈히 소화했다. 심지어. 양말도 알록달록한 것들로 바뀌었다. 거무죽죽 걸레 같은 면양말만 신던 녀석이! 이후. ‘탈평범’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내 옷들은. 한순간에 누더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간 만사 새옹지마라더니. 라는 옛 속담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동생 녀석은. 정상 궤도에서 이탈해 껑충껑충 날뛰었다.

상향 조정된 동생의 스타일 때문이었을까. “동생 분이 멋지시네요.”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30년이 넘도록. 들어 본 적이 없는 언급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세련된 멋쟁이는. 언제나 ‘나’였다. 그런데. 역전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런 옷은 어디서 사는 거냐?”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동생 녀석을 붙잡고 물었다.

“몰라.”

“몰라?”

“사서 주면 입는 거라서 난 몰라.”


‘인간 체험’이나 파는 줄만 알았다. 패션이나 스타일링에 소질이 있는 줄이야.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입는 옷은 검정색이나 회색이 대부분이었다. 그 옷이 그 옷 같았다.


‘대리 만족이야, 뭐야?’

내 궁금증이 까딱거렸다. 와이프를 조종해서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주말에 같이 쇼핑이라도 가지 그래?”

“쇼핑이 세상에서 젤 싫대.”

“엥?”

“붐비는 곳에 가는 걸 싫어하더라고. 완전 집순이야.”

집순이. 

와이프는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철마다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사람이 집순이라니. 집구석에만 박혀 있는 사람 치고는 여행을 무척 즐기는 듯했다. 도무지 사리에 맞지 않았다. 와이프의 도움이 더 필요했다.

“주말에 할 일 없으면, 이 기회에 우리랑 교회라도 같이 가자고 해 봐.”

“무신론자인데 가겠어? 그리고 주말에 바쁘대.”

집안이 불교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이롱불자’ 정도로 여겼다. 무신론자.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낌새 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신은 존재하나요?”

“당연하지. 그 분은 나와 항상 함께 하시니까.”

“그렇군요.”

초롱초롱 빛나던 그녀의 두 눈. 

그때도 같은 눈빛이었다. 꿈틀거리는 나의 내장을 칭칭 동여매는. 살벌한 눈빛 말이다.

‘이럴 때일 수록 침착하게!’ 

나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옛 실력을 발휘해야 할 시간이었다. 새로운 인물을 위한. 포장 작업을 해야 할 타이밍. 다만. 포장지 선택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너무 화려해도, 그렇다고 너무 칙칙해도 안 되었다. 옷입기의 난위도 중 으뜸이 비지니스 캐주얼이라고 하지 않던가. 비슷한 맥락이었다.

예술가가 지녀야 할 덕목 중 하나를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분위기’를 꼽았다. 

재능, 창의력, 소통, 독창성……. 

모두 개소리였다. 서로서로 베껴대는 것도 모자라. 자가 복제까지 서슴치 않는 세상이 아닌가. 실상은 ‘카피’지만. 그럴듯하게 ‘영감’라고 꾸며 댄다고 할 수 있겠다(과장, 반복, 점층, 열거, 대조, 미화 중 제일이 ‘미화법’이다). 따라서. 예술가라면 안갯속에 갇혀 있는 것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를. 적절히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운’까지 덧붙여 진다면. 베스트 시나리오였다.

잊고 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나의 ‘마력’에 도취되어 흐느적거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후훗! 내 희뿌연 속내를 헤아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겠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 파악할 수 없는 사회가. 예인들로 뭉쳐진 공동체이지 않은가. ‘그들만이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 그저 나온 것이 아니었다.

<계속>

비행 원숭이 조련사 (1)

첫인상. 

나쁘지 않았다. 

방실거리는 눈웃음. 동글동글한 얼굴. 토실한 볼에 오목하게 패인 보조개. 

귀여운 편에 속했다. 전형적인 강아지 상이었다. 아무튼 평균 이상이었다. 나는 이 기막힌 반전에. 하마터면 박장대소할 뻔했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찢어진 눈. 불거진 광대뼈. 두리뭉실한 주먹코. 기다란 주걱턱, 콧방울 옆에 붙어 있는 돌쇠 점…….

‘인상주의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이냐고? 어이쿠!’ 

아니었다. 다름 아닌. 동생 녀석을 거쳐간 과거 여자들의 특징이었다. 하나같이 ‘개성’이 넘쳤다. 좋게 말해 개성이지. 그냥 못난이들이었다(한번은 “넌 눈깔이 발가락에 달렸냐?” 하고 동생을 몰아붙인 적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그녀는 최상의 미모를 자랑했다. 동생 녀석이 제법 용하게 낚은 듯이 보였다. 아무렴. 그때는 그랬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난데없이 불쑥. 그녀의 입에서 ‘쓰레기’라는 말이 터져 나왔을 때. 번뜩 알 수 있었다.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괴물이라는 것을.

*

그녀는 야무진 맛이 없었다. 

요리도 서툴고. 칼질도 엉성했다. 바느질은 할 줄도 몰랐다. 단추가 떨어진 셔츠나 외투는 모아 두었다가 수선을 맡긴다는 소리에.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듯. 빈틈투성이였다. 게다가 왼손잡이라. 무엇을 하든 어색하기만 했다. 동생 녀석은 “하는 일 외에는 무관심해서 그래.” 하고 둘러댔다.

“하는 일이 뭔데?”

 동생은 ‘인간 체험’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인간 체험?’

무슨 말인지 납득이 쉽지 않았다. 더 물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개괄적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 벅찬 전문 직종이었다.

여럿이 대화를 나누면. 그녀는 주로 듣기만 하는 편이었다. 반면. 호기심이 많아 늘 질문이 넘쳐났다. 가끔씩. 나는 그녀가 던지는 물음에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당황해서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허허 웃음으로 대충 덮어야 했다.

우연한 기회에. 독립 영화에 출연을 한 적이 있었다(아무리 작고 허접한 영화라도 주연이라는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예술가라면. 표현의 폭을 넓히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웃기는 게 사람 마음이라고. 스크린에 비친 내 모습을. 주위 사람들이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가능한 비밀에 붙이고 싶었다. 특히. 가족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명까지 썼다. 그런데 어쩌다 알게 된 동생 녀석이. 나불거리고 말았다. 철저했던 계획은 그렇게 날아가버렸다.

“어떤 역할을 맡았나요? 저승사자? 쇼맨? 왕?”

그녀의 질문이 어김없이 빗발쳤다.

“악역.”

“나쁜 남자인가요? 부인 몰래 바람이라도 피우는?”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동생 녀석은. “어떻게 알았어?” 하고 박수까지 쳐댔다. 못난 놈. 

“응. 신선하고 재미있었어.”

“그래요?”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환하게 반짝이던 그녀의 두 눈. 어찌 보면. 아이처럼 해맑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투명하고 또렷한 눈알은. 굽이지고 으슥한 곳을 후벼대는 것만 같았다.

‘사귄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니잖아.’

그때부터였는지도 몰랐다. 남몰래 빌었던 시점이. 동생과 그녀의 관계가 끝장나기를.

flying-monkey-in1.png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