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인은 느리게 눈을 깜박깜박했다.
어느새. 집 안은 캄캄해져 있었다.
“라이트.”
미광 등이 소리 없이 불을 밝히자. 어둑한 거실의 모습이 나타났다.
“잠이 들어 버렸네. 도대체 몇 시지?”
자인은 손등으로 눈언저리를 비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속이 매슥대고 입안은 텁텁했다. 마치. 지난 밤 숙취가 덜 풀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 자인 · 이제 일어난 건가요 · 지금 시간은 19시 56분입니다 ]
느닷없이 들려오는 음성에. 자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악! 외마디 비명을 내뱉었다.
“닥터 아이시스?”
오그라진 가슴팍을 뚫고 두근대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닥터 아이시스, 어디 있어요?”
주변을 둘러 보았다. 분명. 아이시스의 목소리였으나. 홀로그램을 찾을 수가 없었다.
[ 헬로 · 아이 엠 닥터 아이시스 ]
아이시스의 차분한 음성이 주방 쪽에서 들렸다. 자인은 어정어정 자리에서 일어났다.
“닥터 아이시스? 지금은 상담 시간이 아니잖아요.”
[ 난 자인을 걱정하고 있어요 ]
자인은 갈피를 잡지 못한 듯.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식탁 위에 올려진 찻잔을 발견했다. 막 우려낸 것인지 모락모락 하얀 김이 피어났다.
[ 자인 · 앉아요 ]
식탁 뒤에서 아이시스의 음성이 들렸다. 자인은 고분고분 의자에 앉았다. 은은한 차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 자인이 좋아하는 차로 준비했어요 · 스위트 매그놀리아 그린 ]
“어머, 정말이네요. 고마워요.”
따끈한 차를 홀짝이던 자인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좀 생소한데요? 상담 시간 외에 우리가 따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
[ 우리 · 자인과 나 · 당신과 나 · 참 좋은 말이군요 ]
“정겨운 표현이죠. 가끔 ‘우리’라는 굴레 때문에 숨이 막히기도 하지만요.”
[ 정확히 어떤 느낌인가요? ]
“실제로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할까요? 좀 더 심할 경우에는 당장 질식할 것만 같은 위기감을 느끼기도 하고.”
[ 삼바트라가 도움이 되나요? ]
“내게 삼바트라는 산소 호흡기에요! 숨통이 막혀 오는 순간순간마다 소중한 산소를 공급해 주는 것 같아요.”
[ 다행이군요 ]
“그런데, 좀 전에 날 걱정한다고 했는데…….”
[ 스트레스 호르몬이 당신의 건강을 해치고 있어요 · 특히 당신과 무사가 부딪힐 때마다 그 수치는 올라가죠 · 뇌 밑의 작은 영역인 시상 하부는 신체의 경보 시스템을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 이 시스템은 신경과 호르몬 신호의 조합을 통해 신장 꼭대기에 위치한 부신을 자극하여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을 포함한 호르몬을 방출합니다 · 그러므로 무사와의 갈등은 인지되어 있는 위협으로도 간주할 수 있어요 ]
“닥터 아이시스의 우려는 잘 알겠어요.”
자인은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속으로는. 위협이라고 하는 건…… 너무 극단적인 묘사 아닌가? 하고 웅얼거렸다.
[ 자인 · 여전히 이해 못하고 있군요 ]
“무슨…….”
[ 당신은 자유로워져야 해요 · 당신의 생각과 삶의 철학을 관리 감독하려는 무사로부터 ]
자유. 자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외치는 말이었다. 타인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편인 무사는 자인의 숨김없는 언행을 항상 경계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자인에게 투영하려고 노력했다. 남들에게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럴 때마다. 자인은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강하게 저항했다. 부부 싸움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 당신을 완성시킬 누군가는 필요하지 않아요 · 당신을 완전히 받아 들일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지요 ]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으나. 자인은 영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었다. 상한 음식을 입에 넣었다 뱉고 난 후에도 남아 있는. 찜찜한 뒷입맛 같다고나 할까.
‘왜 이제야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주옥 같은 명언은 상담 치료 때 했었어야지!’
[ 세상의 모든 것에 날개가 달려 있듯이 자유를 향해 날아가야 해요 ·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삶을 향해서 말입니다 · 당신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해요 ]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 번은 하죠.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동 애플리케이션을 통해서 아프리카를 여행하곤 해요. 최근에 나미비아의 워터버그 고원에 갔었어요. 뛰노는 영양, 버팔로, 코뿔소 떼를 바라보며 나도 광활한 대지를 마음껏 누비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인을 눈을 감았다. 한가롭게 초목을 뜯어 먹고 있는 한 무리의 기린 틈 사이로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올림푸스 산에서 만끽하는 아름다운 일몰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려면.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 잠시 잃어버린 당신의 왕좌를 다시 되찾을 때입니다 · 우뚝 솟은 당신입니다 ·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세요 ]
자인의 입 주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비록 고전 연극 대사 같았지만. 아이시스의 언급이 나쁘지 않았다.
‘이럴 땐 제법 인간적인 걸?’
[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나요? ]
“아니에요. 그냥…… 뭐랄까, 옛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서요.”
자인은 하품을 했다. 눈꺼풀이 차츰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닥터 아이시스, 이만 자야겠어요. 다음 주에 만나요.”
[ 굿 나이트 · 자인 ]
자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