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로 · 아이 엠 닥터 아이시스 ]
아이시스가 등장했다. 여성의 음성을 가진 아이시스는 또박또박한 발음을 구사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친절하지도 무뚝뚝하지도 않은 특이한 어투는. 여느 인공 지능들과는 확연히 다른 면이 있었다.
“헬로, 닥터 아이시스.”
“…….”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자인과는 달리. 무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홀로그램만 매섭게 노려보았다.
[ 그럼 시작하기 전에 바이오센서 장치를 착용해 주세요 ]
무사는 멀뚱멀뚱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밴드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안 할 거야?”
자인은 꼬은 다리를 풀더니. 척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이미 머리와 가슴에 센서가 달린 띠를 빈틈없이 두르고 있었다.
[ 무사 ·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군요 ]
“…….”
무사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고개를 몇 번 절레절레 흔들던 자인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무사의 미성숙한 태도를 깨끗히 묵살하고 싶어서였다.
한참 시간을 끌던 무사의 입에서.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소의 기분이 이런 걸까요?”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왔다. 자인은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까딱거리던 발목을 멈추고.
‘저런, 미친!’
무사의 해괴한 물음에 허리를 곧추 세웠다.
[ 현대인은 가축을 도살장에서 도축하지 않습니다 ·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겁니까? · 근래에 게일 아이니츠의 처녀작인 <도축장>을 읽은 건가요? ]
“예방 주사 맞기 싫은데, 부모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향하는 아이의 심정과 비슷하다는 뜻이겠죠.”
자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더이상 무사의 허튼소리를 간과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라도 보여주는 듯했다. 그사이. 무사는 등이 후끈거리고 호흡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죄없는 쿠션이라도 좋으니 주먹 세례를 흠씬 퍼붓고 싶은.
‘크아악!’
파괴적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걸핏하면 하이재킹이지!”
“주사는 아프지만 결론적으로 질병을 예방하는 거니까. 죽어버리는 소랑은 그 본질부터 달라. 어떻게 당신은 부부 상담 치료를 그 소름끼치는 도축장에 비유할 수 있는 거지?”
“그만큼 개운하지 않다고!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든다고! 왜 내 입장은 전혀 생각해 주지 않는 거야?”
무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 무사 · 오늘 상담에서 불쾌한 감정의 원인을 찾아 보는 건 어떤가요 ]
“찾을 수 있겠어요?”
[ 물론입니다 · 상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바이오센서 장치를 착용해 주세요 ]
‘큰소리 땅땅 친다 이거지? 두고 보겠어!’
무사는 앞에 놓인 두 개의 밴드를 각각 머리와 가슴에 둘렀다. 어쩐 일인지. 닥터 아이시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수상했다. 평소의 그라면 시간을 더 끌었을 것이다. 터무니 없는 트집을 잡아서라도 말이다.
[ 앞서 말했지만 과거 상담 치료사의 접근 방식은 주로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 - 직관 -가족력 - 심지어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는 제외한 상태로 말입니다 · 그에 반해 현대 상담 치료는 심박수 - 혈압 - 땀 배출량 - 호흡 - 그리고 내분비 및 면역 기능의 수치를 분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합니다 · 잘 이해하셨으리라 믿고 지난 주에 토론했던 주제로 다시 돌아가 보겠어요 · 자인? ]
“자, 잠깐만!”
자인이 입을 떼려는 순간 무사가 가로막았다.
“왜 항상 자인이 먼저 하는 건가요? 이번엔 내가 먼저 해야겠어요.”
[ 상담 치료에 있어 순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 하지만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면 오늘은 무사가 먼저 시작하세요 · 자인 · 그렇게 해도 되겠죠? ]
“상관없어요.”
자인은 훅 하고 숨을 짧게 뱉고는. 양 손가락을 펼쳐서 눈썹을 매만졌다.
“봤죠?”
무사는 놀랍지 않냐는 듯 눈을 뗑그랗게 뜨더니. 퀭한 미소를 입가에 싸늘히 지었다.
[ 자인의 보디랭귀지에 기분이 상했다는 의미인가요? ]
“시작 전부터 날 무시하잖아요!”
[ 무사 · 일방적인 비난은 좋지 않아요 · 지난 상담 치료 시간에 우리가 했었던 훈련을 잊은 건가요? ]
무사는 양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힘껏 잡았다. 고개를 홱 뒤로 젖히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망할 놈의 훈련, 훈련, 훈련!’
한동안 물끄러미 천장만 응시하던 그는 슬그머니 자인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차피 지나가야 할 관문이었다.
“나는…… 당신의 작은 행동들로 인해 기분이 자주 잡치…… 아니…… 상하는 편이야. 왜냐면 차갑고 쌀쌀맞게 느껴지거든. 좀더 부드럽게 나를 대해 줄 순 없을까?”
[ 자인 차례입니다 ]
“내 행동이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유감이야. 하지만 별 뜻 없는 행동이었어.”
[ 좋습니다 · 비난을 삼가하고 ‘나’로 시작하는 진술을 통해 불만을 명시하도록 노력하세요 · 그 접근 방식은 비판단적이고 포용하는 자세를 수반해야 합니다 · 여기서 핵심은 기분에 중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 계속 진행할까요? ]
“나는 너무 행복할 것 같아. 만약 당신이 그 ‘별 뜻 없는’ 언행을 하기 전에 조금만 내 기분을 생각 해 준다면.”
“무사, 한편으로 나는 당신이 내 입장도 이해해 주기를 바래. 당신이 나의 관심을 잔소리로 오해하거나, 내 의견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 자인 · 관심과 의견의 예를 들어주세요 ]
“삼바트라에 관한 거에요.”
[ 닥터 파레의 처방에 문제가 생겼나요? ]
“닥터 파레의 처방은 적절했어요. 스트레스로 인한 복합적인 증상들이 다소 누그러진 것 같아요. 문제는 처방전이에요. 그걸 이용해 향정신성 약물을 구입할 수 있으니까요. 내 남편 무사가 그랬듯이.”
무사를 흘겨보던 자인은 곧장 말을 이었다.
“그 입수 경로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하지만 ‘우메르’라고 불리는 물건이 지금 이 집 어딘가에 있다는 거죠.”
눈을 내리깔고 있던 무사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 우메르를 발견했을 당시 기분이 어땠나요? ]
“솔직히 우메르가 어떤 약인지 몰랐어요. 겉포장도 삼바트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단지 아무 것도 명시되지 않은 무지 포장인 것이 이상했다고나 할까요?”
[ 감정 상태를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해 줄 수 있을까요? ]
“닥터 파레로부터 우메르의 기능과 작용에 대한 설명을 들은 이후…… 절망감을 느꼈어요. 배신감일 수도 있겠네요.”
[ 마지막 섹스는 언제였나요? ]
자인은 꽤 오랫동안 반으로 나뉘어져 있는 그들의 침대를 떠올렸다. 수면 습관이 판이하게 다른 둘은. 신혼 초부터 떨어져 자기로 동의했었다. 각자에게 최적화된 세팅에서 잠을 청해도. 기이한 잠버릇이 빈번히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주로. 무사는 이불을 걷어찼고. 자인은 잠꼬대를 했다. 특히. 자인은 별안간 웃거나 울거나 하는 경향이 비교적 잦았다. 그런 그들의 침대는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대체로 1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특별한 날이란. 둘이 육체적 사랑을 나누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삼십칠 일 전이었어요.”
내내 눈을 꾹 감고 있던 무사가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소리야? 기억 안 나? 지난 주에…….”
무사는 부릅뜬 눈을 희번덕이며 나지막히 쉬쉬거렸다.
“지난 주라고? 아하! 우메르랑 뒹굴었겠지!”
자인도 질세라 기를 쓰고 반박했다.
우메르는 도파민, 옥시토신, 바소프레신, 세로토닌 분비를 활성화시켜. 일종의 환각 효과를 일으키는 약물이었다. 육체적인 결합 없이도 강력한 오르가즘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마법의 약이었다. 개발자 미상의 이 의약품은 몇 년전부터 입소문을 타고 암암리에 알려져 있었다(삼바트라와 동일한 비영구 타투 형태이기도 하다). 식품의약국의 허가를 받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블랙마켓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부작용이 속출했지만. 품절 현상은 계속 되었다. 삼바트라의 출시가. 우메르를 잡기 위한 고육책 중에 하나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언제부터인지. 우메르는 삼바트라와 맞교환하는 절차를 거쳐야만 구매가 가능했다. 결국. 우메르를 구하기 위해서는. 각각 개인 인공 지능 닥터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가짜로 호소해야 했다.
“뒹굴다니? 보기나 하고 그러는 거야?”
“우메르가 어떤 건지 다 알고 있다고. 그러니 바보 취급 하지 마.”
“그래서 타락이니, 추락이니 막말을 해 대며 내 혈압을 올렸구만!”
“당신의 기준에서는 덕행이고 비상인가 보지? 무슨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사고방식이 그 모양이야?”
“또! 또! 그 놈의 교육 타령! 내가 받은 교육이 어때서!”
“하등. 그것도 최하등.”
자인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부드러운 톤을 유지했지만.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금기 사항 중 하나인 ‘고함 지르기’가. 서슴없이 자행되고 말았다.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거실을 배회했다.
[ 서로에게 비판과 비난은 하지 않습니다 ]
아이시스가 중재역을 하고 나섰다. 그제서야. 자인과 무사의 노골적인 면박과 성난 힐난이 멎었다.
자인은 끝이 뾰족하게 다듬어진 손톱을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기다랗게 자라난 손톱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돌연한 상상이 불뚝 들었다.
‘뻔뻔한 자식! 저 두꺼운 살가죽을 몽땅 벗겨 내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손가락이 옷소매 근처에서 평정심을 잃고 방황했다. 삼바트라의 손길이 그리웠다. 아니. 절실했다. 자인은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했다. 파도처럼 출렁대는 속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던 중. 넌지시 무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사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우두커니 창가에 서 있었다. 눈길을 모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인은 문득.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의 잘못만은 아니야. 그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그의 부모와 선생들의 잘못이 더 커. 그 중에서도…… 어린 아들의 삐뚤어진 생활 습관을 고치지 않고 수수방관만 한 그의 엄마가 가장 나빠!’
자인은 시원해질 때까지 책임의 불화살을 퍼부었다. 잔뜩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미간이 그나마 느슨해졌다.
[ 계속 이어 나가겠어요 ]
자인과 무사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던 긴장감이 약간 이완되자. 아이시스는 상담 치료를 재개했다.
[ 그전에 · 우메르의 소지 - 소유 - 사용은 불법 행위입니다 · 따라서 빠른 시간 내에 폐기 처분되어야 합니다 ]
“베델.”
자인이 베델을 호출하자. 무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메르를 처리해요.”
[ 현재 시간 오후 3시 27분 · 밀봉 후 코비 아일랜드로 보냈어요 · 자인 ]
코비 아일랜드는 각 가정과 연결된 폐기물 처리장이었다.
“베델, 방 청소 도중에 찾았던 거야?”
무사는 취조하듯 몰아붙였다. 친구라고 믿었던 자가 등에 칼을 꽂은 것만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 아니요 · 자인으로부터 정확한 지점을 고지 받았어요 ]
명랑한 베델의 음성이 왠지 서글프게 들렸다.
‘당연히 그랬겠지!’
무사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자신의 작업실 구석구석을 뒤적이는 자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개미핥기처럼 목을 구부정하게 앞으로 쭉 내밀고 킁킁대는 자태 말이다.
“명백한 불법 행위 아닌가요?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남의 물건을 뜯어 본 것은 큰 잘못이라구요!”
“당신 것인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거지? 샤워 부스 안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데, 내가 물건 주인을 찾아야 해? 그렇게 우기고 싶다면 합당한 이유라도 말해 보던지.”
“샤워 부스?”
“그래, 샤워 부스. 당신한테는 가장 로맨틱한 장소인가 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사는 마지막으로 우메르를 보았다고 생각한 곳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5일 전이었다. 무사는 루비와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나 삼바트라와 우메르를 맞바꾸었다. 우메르 딜러이자 공원 관리자이인 루비는. 가장 자연스러운 만남과 교환을 연출할 줄 알았다.
‘지난 주보다 비둘기의 숫자가 줄은 것 같군요. 산란기인가요?’
‘눈썰미가 좋네요. 암컷들이 산란기에 접어들면 따로 모아서 보살펴요.’
‘눈알이 오뚝하고 깃털이 들쭉날쭉한 것이 아직 어린 녀석 같군요.’
무사는 루비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비둘기 한 마리를 가리켰다.
‘오로라에요. 가까이에서 인사해 볼래요?’
루비는 손을 뻗어 어깨 가까이 갖다 대었다. 그러자. 오로라가 푸르르 날갯짓하더니 루비의 손목 위에 가뿐히 앉았다. 루비는 팔을 움직여 오로라를 무사의 얼굴 앞으로 옮겼다. 무사는 오로라의 발가락 사이에 걸려 있는 대롱 모양의 물체를 발견했다. 루비는 무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사가 기다리던 우메르였다. 그는 통대 안에 꽂혀 있는 돌돌 말린 물건을 꺼내기가 무섭게. 손에 쥐고 있던 삼바트라를 통대 안으로 쑥 밀어넣었다. 익숙하고 날렵한 손놀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로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오로라, 바이 바이하고 인사해.’
오로라는 말귀를 알아 듣기라도 한 것인지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기특한 녀석이었다.
‘바이 바이.’
‘그럼 다음에 봐요.’
루비는 다시 어깨 위로 오로라를 옮긴 후. 공원 어디론가 총총히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온 무사는 우메르를 복용할 기회만 엿보았다. 적의 동정을 들여다보듯이. 그러나. 생각보다 여의치 않았다. 비단. 환경 감사 보고서 제출 마감일이 코앞으로 닥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트루디의 개인 트레이닝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려댔고. 베델의 청소 로봇이 온 집안을 쓸고 다녔다. 게다가. 자인은 시시때때로 화상 통화를 이용해 그의 작업실을 들락거렸다.
‘그래, 샤워 부스야 말로 나만의 시간을 조용히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지. 슬프지만 이게 나의 개 같은 현실이라구!’
무사는 목뒤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혈압이 치솟고 있음을 담담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 무사 · 불쾌한 감정의 원인을 찾았나요 ]
찍소리도 하지 않고 있던 아이시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상담 치료 시작 전부터 장담을 하더니. 완전 헛소리는 아니었다. 역시. 인공 지능 다웠다.
“찾았죠! 이 넓은 집구석에서 프라이빗한 공간이라곤 샤워 부스 밖에 없다는 사실이 정말 통탄스럽군요!”
무사는 목청을 높이며 팔까지 훼훼 내저었다. 자인은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잠시나마 가련하다는 생각을 품었던 내가 돌았지!’
눈알을 떼구루루 굴렸다. 결혼 생활은 커다란 틀의 고문. 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요 · 무사 ]
무사는 휘젓던 팔동작을 멈추고. 아이시스의 홀로그램을 쏘아보았다.
창백하다 못해 회색빛이 감도는 피부.
길고 풍성한 은빛 머리칼.
색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커다란 눈동자.
하얀 입술.
푸른 깃털로 덮인 유니폼.
아이시스의 머리 위에는 황소 뿔을 닮은 머리 장식물이 씌어 있었다. 중앙에 부착된 수정 구슬은 색과 모양의 패턴이 시시각각 다르게 변했다. 전혀 깜박이지 않는 아이시스의 눈과는 달랐다. 생명 없이 보이는 외형과 정반대로. 매우 살아 있었다.
[ 오늘의 상담 치료는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 시간에는 ‘건강한 경계선’에 관해 대화하기로 하겠어요 · 상담 분석 결과는 24시간 내로 전달하겠습니다 · 좋은 하루가 되길 바라며 · 굿바이 ]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던 상담 치료가 드디어 끝났다. 자인과 무사는 제각기 머리와 가슴에 두르고 있던 바이오센서 장치를 풀었다.
“무척 고마워. 패대기치니까 속이 후련하지?”
무사는 비아냥댔다. 그는 격투기 선수처럼 목을 좌우로 꺾으며 양주먹으로 원투 펀치를 공중에 날렸다.
“트루디!”
트레이너 트루디와 한판 붙을 기세였다. 아이시스의 상담 치료 후. 반드시 거치는 통과 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맨날 얻어 터지면서 왜 하는 거야?”
자인은 쯧쯧 혀를 찼다.
“맨날이라니?”
“15전 15패가 완패가 아니라구?”
“왜 이래? 2무 13패야.”
“그거나 이거나.”
자인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베델, 핑크 로즈 레모네이드 차를 준비해 줘. 뜨거운 걸로.”
[ 그럴게요 ]
자인은 성큼성큼 트레이닝 룸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무사를 곁눈질했다.
‘보나마나 뻔하지. 당신은 오늘도 참패야.’
*
[ 무사 · 요구대로 웨이트 트레이닝 대신 스파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장비를 갖추겠습니다 ]
무사는 입고 있던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신체 전체를 감싸는 형태의 보디 슈트를 입었다. 보디 슈트는 수천 개의 센서가 장착된 특수복으로. 입고 있는 사람의 세세한 움직임과 모든 공격 포인트는 물론이며. 상대의 타격 또한 실제 상황과 거의 가깝게 전달했다. 가상 현실 속 스포츠를 즐기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무사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복싱화 끈을 단단히 묶었다. <에픽 팔콘 2020> 모델인 복싱화는 한정판 클래식 스타일로. 지난해 자인에게서 받은 생일 선물이다.
[ 준비되었습니까? ]
“덤벼!”
[ 카운트다운을 하겠습니다 · 5 · 4 · 3 · 2 · 1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