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번째 포장지를 뽑아 들었다. 이번에는. ‘예술’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보기로 했다. 색깔도 은은한 파스텔 계통이 딱일 것 같았다. 봄비를 맞고 부풀어 오르는. 꽃망울 같은 느낌을 연출해야 했다. 터질 듯 말 듯. 간질간질 조바심이 일어나게 말이다. 서둘러 각본을 쓰고 캐스팅을 진행했다. 역시나. 동생 녀석이 주역으로 낙점되었다. 그녀는 완미의 경지에 이른 걸작품을. 감상만 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플롯’을 짰다.
1. 내가 속한 그룹에 가입시킨다. 단. 포지션은 ‘내 동생’에 준한다.
2. 동생의 역량이 통할 경우. 무임승차한다.
그렇다고 평생 깔고 뭉갤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에만 배팅을 할 수 없었다. ‘플랜 B’는 필수였다.
3. 동생의 역량이 통하지 않을 경우. 하차한다.
기본 강령이 세워졌다. 그동안 갈고 닦은 연습과 훈련이. 빛을 발할 때가 되었다. 리모트 컨트롤 버튼을 신나게 눌러댈 기대감에. 가슴 한구석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먼저. 준비한 극본 대로 모든 모임에 동생 녀석을 달고 갔다.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만남이든. 가리지 않았다. 나의 인맥을 총동원한다는. ‘순수한 의도’를 각인시켰다. 대신. 사용료는 지불해야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던가. 마침. 동생은 잔눈치에 매우 밝았다. 흔쾌히. 운전사, 요리사, 가정부, 매니저, 비서의 역할을 자청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하고 따지고 드는 대사는.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삐딱한 태도였다. 강요는 일절 없었다. 순전히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로부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딴 세상’에 발을 들인 동생의 가슴에. 서서히 진한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창작에 몰두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래? 아이디어는 있고?”
“전부터 구상만 하던 게 있긴 하거든……. 근데, 형. 내가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못 할 게 뭐가 있어? 첨부터 예술가 명함 물고 태어나는 사람 있냐?”
동생 녀석의 섣부른 의욕에 불을 붙여야 했다. 활활. 그래야만 ‘무임승차’가. 하루 속히 실현화될 수 있었다(동생이 이루고 싶은 분야가 내 오랜 꿈이었기에.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앞으로 열심히 하기만 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해 줄 테니까.”
“고마워, 형. 이 악물고 끝까지 갈게.”
끝까지.
나는 이 대목에 주목했다. ‘충성 맹세’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승리의 깃발을 흔들 시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 수 있었다.
‘들었냐? 네 남편이기 훨씬 이전에 내 동생이야. 맘대로 껴들 수 없는 게 우리 둘 사이라고!’
‘신봉자’에 이어. ‘귀의자’까지 얻었다고 생각하니. 입이 째졌다.
동생은 다짐한 대로 ‘창작’에 전념했다. 낮이고 밤이고. ‘구상 단계’에 머무르던 아둔한 씨앗에. 싹을 틔어 보려고 몸부림쳤다. 비록. 허황된 망상일지라도 말이다. 더 유쾌한 일은. 그녀가 응원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으쓱으쓱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확성기를 들고 “내가 참된 위너다!” 하고 외치고 싶었다. 우월감에 젖어 드는 기분만큼. 행복한 것이 없었다. 최고였다.
나라는 탁월한 인재가. 거기에서 그칠 리가 없었다(괜히 주춤거렸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까). 이럴 때일 수록. 더욱 대담해져야 했다. 칼을 빼든 상황에서. 종이라도 베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 여자는 누구야?”
“추종자.”
“뭔 소리야?”
“지가 좋다고 나대는 골 빈 애야.”
“형, 설마…….”
“내가 돌았냐? 얌마, 쬐끔 받아주는 거 뿐이야.”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과정 중 하나였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기 위한. 불가결한 절차였다. 나는 동생 녀석의 ‘추종자’가 될 만한. 여인들을 엄선했다. 밝혀도, 멍청해도 탈락이었다. 상당한 지적 수준과. 뛰어난 유머 감각을 갖추어야 했다. 겉보기엔 느릿느릿 곰 같은 녀석이. 생각보다 엄청 까다로웠다. 성형 수술 중독녀, 흡연 애호녀, 입방정 가십녀 등등. 하찮은 명목으로 접근하는 족족 냉랭하게 굴었다. 한술 더 떠서. 왼손 약지에 둘러진 반지로 방패막이를 하려 들었다. 오히려. 내가 결혼 반지를 끼지 않는다는같잖은 이유로. 역정까지 냈다.
‘젠장! 호강에 겨워 까불고 있네!’
그녀를 만난 이후. 미각만 훌쩍 발달된 것 같았다. 싸구려 입맛에 길들여져 있던 녀석이. 어느새 미슐랭 가이드 별점이나 따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대책을 궁리해야 했다.
‘들키면 온 동네 망신살로 그칠 리 없지.’
눈을 까뒤집고 덤비는. 와이프의 소름끼치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어설프게 밀고 나갔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일단. 동생 녀석을 위한 ‘추종자 모집’은 보류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유연하게 대응했다.
더 늦기 전에. 세 번째 포장지를 마련해야 했다. 나는 적합한 레이블과 컬러를 강구하는 것에. 온 신경을 모았다. 밤낮으로 머리를 굴렸다.
“집에 혼자 있을 땐 주로 뭐 하냐?”
“별 거 안 해. 영화 보고, 음악 듣고.”
“그게 다야? 들었는데, 쇼핑 같은 것도 관심 없다며?”
“응. 시간 아깝다고 싫어해.”
“영 심심과네.”
“정작 본인은 하나도 안 심심해 해. 어쩌다 퍼즐 같은 거 붙들면 하루종일 하고 그래.”
퍼즐. 동생 녀석 말에 의하면. 낱말, 숫자, 그림 맞추기 등. 그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그깟 지적 만족도나 얻으려고. 여가를 십분 활용하는 별종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잡식성이었다.
‘그래봤자 급급한 발버둥질 아니겠어? 자기만족에 사로잡힌 루저의 발악.’
“그래도 항상 고마워. 나를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으니까.”
“…….”
“누가 그러는데 도를 닦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어서 내가 성공해야지.”
“…….”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는 동생 녀석의 실적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훌륭한 조력자의 자세가. 형편없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열등생의 초라한 성적표를 마주하는 듯했다. 파괴적인 퇴화 현상의 조짐을 보였다. 기합이 잔뜩 들어도 될똥말똥한 시기에! 궁극의 처방이 내려져야 했다.
‘특수 포장지를 써먹을 때야!’
정해진 표 딱지와 색은. 더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카멜레온이 되는 수 밖에.’
주위의 환경과 온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는. 못생긴 파충류의 특성을 흉내내기로 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바로바로 작전을 가동시켜야 했다.
“요즘 자주 피곤하다고 그러네.”
그녀의 컨디션이 나쁜 것 같다며. 동생은 퉁퉁한 얼굴에 걱정의 빛을 띄웠다. 최근 부쩍 늘어난 ‘인간 체험’ 업무에. 불만이 가득했다. 신속히 동생의 이목을 옮겨야 했다. 그녀로부터 내게로.
“지난 주에 정기 검진을 했는데, 찜찜해 죽겠다.”
“왜?”
즉시 먹혀들었다.
“요즘들어 아랫배가 자주 아프고, 가스가 차는 게…….”
“큰 병은 아니겠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내일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인데. 만에 하나 중병이면…… 휴…….”
나는 의미심장한 눈짓을 흘렸다. 이렇게. 동생이 하나를 내밀면. 나는 둘을 내놓았다. 이것이. 카멜레온 전술이었다. 나의 전략은 적중했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동생은 내 주변에서 빙빙 맴돌았다. 보이지 않는 인력에 이끌려. 공전과 자전을 되풀이했다. 차츰차츰. 동생과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간극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옳지! 넌 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란 걸 잊지마!’
외야의 펜스를 넘어가는 ‘굿바이 홈런’이. 점차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형, 전생 체험이라고 들어 봤어?”
“그게 뭔데?”
“최면 요……”
“아, 뭔지 알아. 최면으로 전생을 들여다보고 그러는 거?”
“아는구나.”
“근데 왜?”
동생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미스터 브라우닝>이라는 타이틀의 소설책이었다.
“무슨 내용이야?”
“나도 읽다 말았는데, 흥미롭긴 하더라고.”
“흥미진진이라…….”
나는 책장을 후드득 넘겼다.
“옆에서 하도 재밌다고 노래를 불러서 시작은 했는데. 형, 알잖아. 나 책하고는 사이 별로인 거.”
그녀의 추천 도서. 으레 확인해야 했다.
“그럼 책벌레인 내가 읽어 볼까?”
나는 책을 기꺼이 받아 들었다. ‘A Guy Who Had Many Names’라는 부제로 보아. 외국 도서인 듯했다. 첫 페이지를 펼쳤다.
무의식을 의식하게 될 때까지 무의식은 우리 삶을 지배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어쭈구리!’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의 인용구까지 정성스레 써 넣어져 있었다.
‘뭘 이리 첫 장부터 고매하고 심오한 체 하는 거야?’
나는 콧방귀를 탁 뀌었다.
‘그래도 읽어는 봐야지.’
그랬다. 적을 알고 이편을 알면 백전. 이라는 명언이 있듯이. 이 대결에서 길이 남을 위대한 승전보를 남기기 위해서는. 그녀의 뇌 구석구석을 헤집어 보아야 했다. 병법의 기본이 아니던가. 나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부지런히 넘겼다.
낚시질은 생각보다 훨씬 수월했다. 처음부터 대어가 쉽게 낚였다. 입질이 왔을 때 느껴지던 손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지!
나도 모르게. 빙그레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소설 속 주인공 ‘저스틴 브라우닝’은 나와 닮은 면이 있었다. 초반부터. 끈끈한 전우애 같은 감정이 피어났다.
나는 태생이 수나비란 말이다. 이 운명의 덫에 그녀가 덥썩 걸려든 것이 화근이었다.
특별히.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흡족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독서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속도를 내었다.
‘춤추는 문어발’쯤이야 아주 가뿐하지. 나무에 열린 풋사과들을 영글게 만드는 것은 관심과 사랑이니까.
감동적이었다. 눈물까지 찔끔 자아내는 뭉클한 문구에. 나는 굵은 밑줄까지 쳤다. 나와 비슷한 놈이. 소설 속 세계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놈과 만나면 얼싸안고. 밀린 회포라도 풀고 싶었다.
엘렉트라는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짚고는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브이(V) 자로 깊게 파인 가운 사이로 부풀어 오른 그녀의 젖가슴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읽어 내려갈 수록. 형체도 없는 여주인공의 자취가. 나비처럼 날아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작가는 멀쩡한 사람을 흥분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나는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엘렉트라’ 같은 여인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홀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인공 수정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이라도 엄연한 당신의 핏줄이죠. 게다가 사정한 정액은 당신의 마지막 선물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엘렉트라의 못된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그녀의 사악한 혓바닥을 한입에 삼키고 싶었다.
‘이것 봐, 이것 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솜씨가 상당했다. 알싸한 매운맛을 거침없이 구사하는 모양새가. 자극적인 사고력을 품고 있는 ‘어둠의 형제’ 같았다.
동생 녀석의 책 소개 대로였다. 주인공 놈은 기억에도 없는 전생을 헤매며 쏘다녔다. 기원전 1억 6671만 년 전을 위시해서. 16세기 튜더 왕조 시대와 13세기 자야바르만 7세 시대를 아우르는 해괴한 여행을 하느라 바빴다. 심지어. 아메리칸 인디언의 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에 비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사건도 아니었다. 숱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운 숫자들 앞에는 파산을 암시하는 마이너스 부호가 못된 뿔처럼 달려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눈물이 눈앞을 붉게 물들였다.
‘원! 투! 스트레이트!’
앞부분에서 어머니를 잃은 것도 부족했는지. 이제는 파산 직전에 몰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한방에 훅 간다는 게. 진정 이런 것인가 싶었다. 덩달아. 주인공 놈의 인생이 가엾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분명히. 첫 맛은 달았는데 갈수록 씁쓸해졌다. 나는 책을 덮었다. 웬일인지. 읽기가 싫어졌다. 끝내려면 반이나 남아 있었지만. 끝끝내.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계속>